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현황과 주교좌로서의 명동대성당을 소개합니다.

명동대성당의 역사

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9. 1990년대 한국사회 변동과 명동대성당




1. 머리말


1987년 6월 시민항쟁 이후로 한국 사회는 여러 면에서 새로운 변동의 흐름 속에 놓인다.

한편으로는 국내 정치의 민주화로 인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서 냉전의 종식으로 형성된 신국제질서 속에서 자본의 국제화,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입 등으로 인하여 한국 사회는 기존의 사회 질서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구조를 이루게 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한국 사회의 구조 변동 속에서 명동대성당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살피고자 하며, 더불어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역할이 과거의 모습과 비교하여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고찰에 앞서서 우선 한국 사회의 구조 변동의 원인과 다양한 현상들을 살핌으로써 명동대성당이 자리한 사회적 토대 내지 지형을 이해하기 위하여, 1990년대 한국 사회를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차원에서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 분석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거시적 수준에서 간략하게 살펴 보기만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상징성을 1990년대 명동대성당에서 발생했던 시위 및 집회, 농성 등을 토대로 하여 분석할 것이다. 이는 명동대성당이 한국 사회의 변동에 기여했던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1990년대 한국 사회 현실 속에서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관점을 제시할 것이기 떄문이다. 이와 함께 명동대성당이 개별 본당으로서 펼쳤던 사목활동을 검토할 것이다. 이 역시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명동대성당이 세속화의 흐름 속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사목적으로 대응해 왔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비단 명동대성당만이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 전체의 미래적 전망을 열어가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 1990년대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성


1) 정치 영역에서의 특성

이전의 시기와 비교해 볼 때, 1990년대 한국 정치 현실은 분명히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들은 정치 분야에서 우선 권위주의체제의 해체와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 체제의 탈권위주의화가 곧바로 민주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개방에 의한 탈권위주의화와 함께 민주주의의 새로운 계급적 내용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부의 불평등한 배분과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재생산해내는 생산과 분배체제를 개혁하여 노동자의 권리, 소득 재분배, 복지, 독점자본의 규제와 같은 사회경제적 개혁 내용이 현실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1990년 대 한국 사회가 보여준 민주화는 민중의 사회경제적 권리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민주화의 만족스런 실현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첫 단계인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의 단계를 거쳐 ‘실질적 민주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시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 경제 구조의 특성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살펴 볼 때,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는 독점 자본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독점 자본주의가 정경유착을 통해 확립 강화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 자본주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획기적인 구조 변화를 겪게 된다. 1990년대에 들어서 이같은 변화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자유주의적 노동 통제, 유연 생산체제, 신포드주의, 수량적 유연성 추구, 다기능화, 중앙단위 임금 교섭, 규제완화 등이 그것이다. 또한 세계경제체제가 보호주의와 경제 블럭화라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 것도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 아래 대자본에 대한 규제 조치를 완화하고, 자금 지원을 단기간에 확대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같은 정부의 조치들은 1980년대부터 대자본이 국가에게 요구하였던 논리와 부합하는 논리로서, 결국 독점 대자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모든 산업구조를 재편하겠다는 의도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 정책의 본질은 자본에게는 국가 경쟁력의 강화를 위한 자본의 효율적 재편성이라는 명분 아래 전폭적인 지원을, 노동에게는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본에 대한 국가의 구조적 의존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자본의 전횡적 지배를 강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국가와 자본의 전략에 대해 노동운동은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침체의 길로 치닫게 된 것이다.

3) 사회문화적 차원에서의 특징

1980년대 고속 성장으로 인해 한국 사회 계층 구조면에서는 새로운 중산층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전문직이나 관리직 계통의 화이트 칼라 노동자층, 또는 지식인층으로서 소득과 교육 수준이 높고, 중산층에의 귀속의식이 강한 특징이 있다. 1980년과 1985년 한국 가구의 주관적 계층의식을 비교해보면, 상층 의식을 가진 계층은 2.6%에서 4.4%로 증가하였고, 중산층 의식을 가진 계층은 41.0%에서 53.0%로 증가하였으며, 하층 의식은 56.4%에서 42.6%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인의 계층의식이 급속히 중산층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중산층은 현대 사회에서 시민 문화의 담당자로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1990년대 들어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사회운동이 크게 활성화 된 것도 중산층의 성장과 연결지을 수 있다. 새로운 사회운동은 사회의 기본 구조나 체제의 변화보다는 사회문제 그 자체의 개선 내지 완화를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사회운동 영역에서의 주도권은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 '경제정의실천 시민연합'을 필두로 다양한 문제 영역에서 크고 작은 시민단체들이 만들어지고 활성화 되었다. '공해 추방운동 연합(후에 환경운동연합으로 확대됨)', '여성단체 연합', '기독교 윤리 실천운동', '학부모 연대', '참여연대'가 새로이 만들어져 경제정의, 환경, 남녀평등, 교통, 인권, 교육, 복지, 부정부패추방, 바른 언론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1990년대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개인적 차원의 문화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문화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는 일체의 사고 및 행위를 획일적으로 강요받던 과거의 시기와는 달리 다양한 욕구들이 분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새로운 삶의 방식들이 나타나고, 일상적 의식과 행동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또 이러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는 공간들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문화 형성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 중 두드러진 것으로 ‘신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풍요형 소비문화와 생활 문화를 들 수 있다. 다양한 욕구 분출에 의한 새로운 삶의 양식들과 경제 성장에 의한 소비 문화는 상업주의의 부추김 속에서 과거 시대와는 달리 빠르게 그 대상과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그래서 1990년대는 또한 소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소비의 유형에서 다른 계층과 차이와 차별을 강조하는 형태로 소비의 유형이 바뀐다. 따라서 차별화된 소비, 사치, 낭비의 새로운 계층별 소비 패턴이 발생하게 되고, 소비의 규모와 질에 따라 생활양식과 의식, 문화가 다른 계층으로 분화 되는 것이다.

3.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위상


1)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상징성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상징성은 한국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건물 자체가 최초의 서양식 고딕 건물이라는 이유에서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의 시기에는 사회 원조를 위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빈민구제를 위한 장소로 여겨졌으며, 1970-1980년대 명동대성당은 ‘민주화를 위한 성지’, ‘인권 보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의 성소’로서 그 상징성을 갖는다. 특히 1970-1980년대에 뚜렷하게 부각된 명동대성당의 상징성은 한국 역사의 특수한 상황속에서 사회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것은 이 시기의 명동대성당이 말 그대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권위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저항의 영역으로서 반체제적인 모임과 활동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권의 부도덕성을 드러냄으로써 한국 사회 정치적 변동의 중심으로 자리하였던 까닭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자유로운 정치적 비판이 억압당했던 당시의 암울한 상황에서 여러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정권의 불의를 고발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열망과 의식을 한국사회에 고취시켰던 희망의 장소가 명동대성당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호소할 데 없이 내몰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섬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힘을 다했던 곳도 명동대성당이었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은 현대사에서 양심세력들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요 주요한 활동 무대였다.
이같은 명동대성당의 상징성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유신 체제와 5공화국 아래에서 더욱 확고해졌고, 1995년 6월 6일 한국통신 노조원들을 연행하기 위해 공권력이 명동대성당에 투입되었을 때에 정권의 부도덕성을 질타한 각계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에서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상징성은 도덕적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회적 합의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2) 1990년대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위상

1987년 6월 이후 한국사회가 형식적이나마 민주화의 과정으로 진입하면서, 각계각층이 점차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천주교회의 민주화 운동이 위축된다. 게다가 교회의 보수화가 급속히 진행됨으로써 정치적 보수화내지 탈정치화가 이루어진다. 천주교회의 이러한 변화는 권위주의체제 아래에서 교회가 민중부문의 정치적 대변자의 기능을 수행하던 사회참여적 교회에서 교회의 본연의 역할인 구원과 전교의 교회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1990년대 명동대성당도 과거와는 달리 탈정치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얻게된 ‘인권의 보루’라는 사회적 상징성 위에서 명동대성당은 1990년대 새로운 위상을 보인다. 여기서는 1990년대에 명동대성당을 점거하여 행해졌던 각종 시위 및 집회를 분석함으로써 그 새로운 위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명동대성당에서는 총 445건의 시위 및 집회, 또는 점거 농성이 일어났고, 이를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매해 64건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를 다시 쟁점별로 유형을 분류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이같은 분석을 통해 볼 때, 명동대성당에서 있었던 시위와 농성들은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드러난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표> 명동대성당 시위 유형 분류

연도 정치 경제 노동 사회 통일
1991 11 0 4 5 1 21
1992 16 2 8 7 0 33
1993 19 8 14 21 1 63
1994 14 8 19 28 1 70
1995 34 3 14 38 2 91
1996 36 2 30 24 2 94
1997 27 7 23 12 4 73
157 30 112 135 11 445

첫째는 민주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와 노동에 관한 쟁점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앞의 <표>에 나타났듯이 6공화국과 문민정부 아래에서도 한국사회는 민주화로의 이행을 위해 끊임없이 정치적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둘째로 한국사회 안에 구체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명동대성당에서 행해졌던 시위 및 농성 중 사회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분석해 보면 이 점이 보다 자세히 드러난다. 즉 환경, 사회복지, 여권운동, 교육개혁, 문화운동과 같은 시민사회의 주요 쟁점들이 주제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빈도수에 있어서도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가 발견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사회가 점차 시민사회로 전환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991년부터 1997년까지 각년도의 합계를 비교하여 볼 때, 명동대성당은 한국사회의 여러 모순과 쟁점을 표현하고 문제화하는 공간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안이 되는 쟁점들이 발생하면 명동대성당은 그러한 현안을 해결하고자 하는 시민 운동의 공간으로 자리하였다. 예를 들어 우루과이라운드 문제, 원진 레이온 공장 공해문제, 공안정치에 대한 항의, 군사반란자 기소를 위한 범국민 대회, 외국인 노동자 문제, 대선자금 공개 문제는 시대적인 특징을 가지는 현안들이었다.
명동대성당의 시위 유형분석에서 보듯이 명동대성당은 그동안 참으로 엄청난 시위와 농성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면 명동대성당이 시위 공간화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하는데 있어서 굳이 명동대성당을 택한 것인가를 살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여러 이유 가운데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명동대성당의 지역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농성자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조직적 특성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천주교회의 조직에 의지함으로써 농성자들의 주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한국 천주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빌어 농성자들은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천주교회가 가지는 고유한 도덕적 권위와 함께 김수환 추기경 개인의 도덕적 권위에 근거해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또 김수환 추기경의 도덕적 권위에 호소하기 위해 명동대성당을 시위 공간으로 삼는다고 하겠다. 네째로 명동대성당이 가지는 사회적 상징성 때문에 명동대성당이 시위 공간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명동대성당의 새로운 상징성

1970-1980년대 한국사회 안에서 ‘민주화의 성지’ 또는 ‘인권보호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지던 명동대성당이 1990년대 들어와서 그 상징성에 있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한국사회가 민주화 됨으로써 반체제운동과 같은 정치적 쟁점이 점차 그 정당성을 잃게 되었다는 점에서, 또 명동대성당에서 주도적으로 반체제적인 쟁점들을 여론화하지 않는 소극적 입장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같은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동대성당이 시위 및 농성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것은 한국사회 변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이제는 한국사회가 시민사회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장으로 명동대성당이 선택되는 것이다.
이 점은 앞서 살펴 보았던 1990년대 명동대성당 시위 및 농성의 유형 분석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1991년에는 몇 건에 지나지 않던 사회복지, 환경과 같은 사회적 쟁점에 관한 농성 및 시위가 그 이후 시간이 갈수록 정치나 노동의 문제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1990년대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이야기할 때, 1970-1980년대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민주화를 위한 성지’라고 한다면, 1990년대에는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 명동대성당을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한 매개자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4. 명동대성당의 교회적 상징성


명동대성당은 사회적 상징성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명동대성당은 지리적 특수성으로나 규모면에서, 또 사목에 관한 제반 여건에 있어서, 초본당적인 본당으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얼굴이며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의 사목은 다른 본당 사목의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이 되고, 새로운 사목활동을 위한 토대가 된다. 명동대성당의 변화는 교회적 상징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교구나 본당의 사목 방향을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와서 명동대성당은 여러 면에서 새로운 사목을 시도했다. 그것은 1990년대 한국사회의 다양한 변화가 수반되면서 종교적 환경 역시 바뀌게 되었기 떄문이다. 명동대성당의 새로운 사목은 사회 변화와 함께 종교적 환경의 변화에 적합한 사목활동을 모색하는 교회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명동대성당의 사목적 특색은 먼저 계층별 사목을 들 수 있다. 명동대성당은 교적 신자 60% 이상이 젊은층으로 구성된 교회로서 청년사목을 위한 중요한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에 따라 청년들을 위한 청년 성서모임과 청년 명례방과 같이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모임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이는 1990년대에 들어서 갑자기 청년들의 문화가 과소비와 유흥, 향락으로 흐르는 사회 분위기에 대응하여 건전하고도 신심있는 청년문화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어버이 성서 모임, 또는 주부들을 위한 성서 모임, 전문적인 신학을 교육하는 신앙학교와 같이 각 계층에 어울리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함으로써 사목을 일방적인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
둘째로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사목활동이다. 명동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주변에 많은 직장인들이 밀집해 있는데, 명동대성당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사목활동을 펼친 것이다. 명동대성당은 매년 1,000여 명에 이르는 예비신자들을 교육하고 세례성사를 베푸는 전교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에서는 이러한 현실에 맞게 예비자 교육을 강화하여 다양한 계층의 예비자들이 교육받도록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지도자로 하는 예비자 교리반을 운영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장인을 위한 미사를 개설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일상적 삶의 차원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또한 시의 적절한 주제를 선정 다양한 특강을 실시하여 신자재교육을 하는 점이다. 이러한 특강들은 명동지역에 근무하는 일반인들에게도 명사들의 시사적이고 교양적인 강의에 참여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지역적 특성에 적합한 사목인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 명동대성당의 사목적 변화에서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문화에 대한 관심과 문화적 생활을 위한 사목적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과 발맞추어 명동대성당도 새로운 사목의 내용을 문화와 연결시켰던 것이다. 이 점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다양한 문화공연을 위한 공간으로서, 둘째로 문화 생활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교회의 공간들을 개방하여 공간 효율성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교회를 일상적인 삶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활 속의 공간으로 자리잡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교회건물의 문화공간화는 교회를 단지 전례나 성사의 공간으로 제한하는 것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삶의 공간으로 인식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기 떄문이다.
명동대성당은 또한 성사와 전례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 왔다. 상설 고백소를 개설한 것은 어느 때고 신자들이 고해 성사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점에서, 지하성당에 성체를 현시하여 성체조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성사의 생활화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명동대성당은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전례를 가장 아름답게 접할 수 있도록 전례를 활성화한다는 점에서 전례와 성사생활의 중심지인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 명동대성당은 한편으로는 사회변화의 흐름에 따라 이같은 새로운 사목을 시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위한 재교육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자 재교육의 강화는 천주교신자들에게 천주교회의 규범과 가치관을 철저하게 내면화시켜 실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회의 사목이다. 명동대성당은 성서강좌, 신앙학교, 특별 강좌 등을 통하여 신자들이 신앙인다운 모습으로 생활하도록 재교육을 강화해 왔다. 이는 신앙인들에게 복음적인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하여 각자에게 부여된 사도직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며, 생활 속의 신앙을 구현하기 위한 사목적 노력이라고 할 것이다. 신자 재교육의 문제는 다원화되고 그럼으로써 여러 가치관이 혼재하는 현대 사회와 같은 상황하에서는 더욱 중요한 사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체 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명동대성당은 이러한 시대적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강구함으로써 같은 상황하에 있는 다른 교회들에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를 상징하는 교회의 얼굴이며, 또한 서울대교구의 주교좌본당으로서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명동대성당은 그동안 교회 내외의 현안들에 대해 복음적인 입장을 제시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얼굴로 자리잡아 왔다. 이와함께 명동대성당의 사목활동이 다른 본당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사목활동에 있어서도 교회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명동대성당은 교회 안에서도 상징적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명동대성당의 교회적 상징성은 시대의 변화를 따르면서 새롭게 사목활동을 모색하는 과정 가운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5. 명동대성당의 미래 전망


축성된지 100년 동안 한국 역사와 함께 생활해 온 명동대성당은 이제 또 다른 천년기를 준비해야 할 시점에 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이미 지난 100년과는 또 다르게 전개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고, 이에 따라 한국사회 역시 내외적으로 급격한 변화의 물결속에 놓일 것으로 예상된다. 명동대성당의 미래적 전망도 이같은 다가올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하며 변화를 바르게 유도하는 사목정책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목정책은 명동대성당이 기왕에 획득한 상징성을 유지, 발전시키는 토대 위에서 기획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올바르게 유도해 가는 사회적 역할의 측면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의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측면에서 명동대성당의 미래적 전망이 필요한 것이다.

1) 미래적 전망에서의 사회적 역할

명동대성당은 1970-1980년대에는 민주화의 성지로, 1990년대에는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동대성당의 역할이 한국사회의 문제를 통찰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결과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동대성당이 한국사회 안에 상징성을 띠며 자리잡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와 명동대성당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은 한국사회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하고, 이에 맞갖은 역할을 모색해야 할 상황에 있다. 다시 말해 명동대성당이 수동적인 집회의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여론을 주도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의 명동대성당에게 부여되는 과제가 되는 것이다.
명동대성당은 다양한 사회적 행위 주체들 중의 하나로서 시민사회의 행위 주체이며, 동시에 여러 가지 조건면에서 한국사회를 성숙한 시민사회로 바꾸어 가는데 유리한 입장에 있다. 한국사회는 아직까지도 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의 확보라는 시민사회의 성숙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이것은 또한 한국사회의 민주화의 한계이며 장애로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은 국가와 사회 사이를 연결지으며 이들 사이에 서로의 자율성이 존중되도록 교량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그간 명동대성당 내의 집회와 농성중 명동대성당이 보여준 단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넘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한 매개자로서의 역할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명동대성당이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한 장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명동대성당 내에 교회의 가르침을 반영한 직접적인 시민참여기구를 설립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명동대성당은 교회 내의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기가 용이하고, 다른 시민기구와의 연대를 형성하기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교회적인 기구를 통해 한국사회 문제를 공론화하고, 여론을 형성하여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게 될 때 이제껏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역사와 함께 하는 교회로 계속해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또한 건전한 시민문화를 형성하도록 계도하는 역할 역시 명동대성당이 앞으로 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완성만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이고 평등한 가치와 규범, 사적 이기주의를 넘어선 공공정신, 질서의식 및 준법정신, 자발적 결사체를 통한 능동적 참여의식, 토론과 설득을 통한 합의 창출 방식 등과 같은 시민문화가 사회화될 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은 주변의 지역적이고 교육적인 여러 여건을 이용하여 이같은 시민문화형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건전한 시민의 양성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올바른 여론 수렴을 위한 공청회를 주관하는 것이나 성숙한 시민 문화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또 이같은 이유에서 또한 명동대성당이 배타적이고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표현하는 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명동대성당은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해 갈등의 해소를 위해 또한 교회 가르침의 구현을 위해 공동선의 정신을 제시하고, 공동선의 정신이 한국 사회안에 뿌리내리는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각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타인의 필요에 따라 공동선에 기여하고, 개인과 전체 구성원간의 조화가 이뤄 나갈 때 한국사회 역시 균형있는 통합를 이룰 수 있기 떄문이다. 또한 공동선의 실현을 위한 명동대성당의 역할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간의 갈등, 계층간의 갈등, 개인주의적 윤리관을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좌표를 제시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2) 교회적 전망에서의 명동대성당

한국의 종교문화의 현실을 살펴 볼 때, 종교의 문제가 여러 가지 사회적 우려를 낳고 있는게 현재의 실정이다. 한국 종교계 일반에서는 질적 성장보다는 양적 성장을 중시하면서 성장 제일주의와 경쟁주의, 물량주의와 업적주의로 흐르고 있어 한국 종교들이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답습하는 현실이다. 또한 종교가 사회정의나 공동선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현세 기복적인 신앙을 강조하여 오히려 한국사회 안에 배금주의와 이기주의적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종교로 하여금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한국사회 속에서 사회적 공신력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 스스로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고, 종교문화를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종교간의 경쟁과 개인주의적 신앙관을 극복하고,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는 공동체적 구원관을 제시하는 종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명동대성당은 다른 교회나 종교집단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명동대성당은 사회로부터 사회적 공신력을 얻고 있으며, 지리적으로도 종교적 여론을 형성하는데 있어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다.
명동대성당은 한편으로는 건전한 한국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할 뿐 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복음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새 복음화는 ‘재복음화’의 의미가 아니라, 교회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의식 속에서 시대의 징표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함으로써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복음과 일상생활 사이에서 새로운 창조적 통합을 이루도록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2000년 대희년을 앞둔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로서의 생동력을 드러내어 한국 사회에 복음적 가치관을 제시하고 정립하여야 할 사명을 갖는다. 명동대성당은 이같은 교회적 사명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전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 중의 교회로서 명동대성당의 이같은 모색은 다른 교회들에게 새 복음화의 원형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또 사목의 방향을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사회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와함께 한국 천주교회 전체에 제기되는 토착화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도 명동대성당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토착화는 지구화와 지역화의 양면성을 조화롭게 보완하고 통합함으로써,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고유성이 안정적으로 균형을 이뤄가는데 연결고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종교 상황인 한국의 종교문화의 측면에서도 각 종교간의 이해를 넓히고 대화와 협력을 이뤄가는데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동대성당은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한국문화를 적절히 이해하고, 수용하여 한국의 정서와 함께 호흡하는 사목 모델과 전례 등을 정립하여야 한다.

6. 맺음말


이상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명동대성당이 1990년대 한국사회 변동 속에서 어떤 위상을 보여왔는지 살펴보았다.

명동대성당은 1970-1980년대와 마찬가지로 1990년대 역시 사회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상징성을 드러낸다. 이 글에서는 이 점을 명동대성당이 담당했던 사회적 역할 속에서, 또 새로운 시대를 맞아 시도했던 사목적 특색을 분석함으로써 논증하고자 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역할은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한 역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명동대성당은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90년대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역할은 1970-1980년대 민주화를 위한 역할처럼 직접적이고 주도적이지는 않지만, 한국사회 변동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순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명동대성당이 사회적 상징성을 가진다는 것은 명동대성당이 담당했던 이같은 사회적 역할을 통해 사회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적 전망에서 볼 때, 이미 사회적으로 부여된 이 상징성을 앞으로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지는 명동대성당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명동대성당이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익 갈등을 조화롭게 조정하여, 사회를 정의의 바탕 위에서 통합하도록 하는 역할속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은 한국 사회의 변동을 명확히 분석하고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성찰하여 이러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기반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는 사목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명동대성당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사회 변동에 따라 교회 내에도 새로운 사목적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고,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얼굴이며 중심으로서 이러한 문제 해결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또 명동대성당은 방대한 인적, 물적, 조직적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전체 한국교회를 위해,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동대성당은 이제 축성 100주년을 지나 새로운 100년을 위한 시작에 서서 한국 사회가, 또 한국 천주교회가 명동대성당에 요청하는 역할 기대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폭넓은 사목계획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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