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4. 해방공간의 명동대성당과 서울교구(1945~1950)
1. 교회 재건과 서울교구 및 명동대성당의 위상 변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과 함께 가장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은 교회의 재건 내지 정상화였다.
그러나 교회의 재건과 정상화는 38도선의 설정에 따른 미소(美蘇)의 분할점령과 군정 실시라는 조건하에서 시도될 수밖에 없었다. 종전(終戰)과 동시에 일제에 의해 징발되었던 대부분의 교회 시설들이 교회의 관리하로 되돌아왔다. 그 중에는 해방공간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 가운데 하나로 기능하게 되는 명동대성당 대강당도 포함되어 있었다. 징병 혹은 징용 당했던 신학생들과 신부들도 1945년 말 이전에 대부분 돌아왔다. 국내에 억류되어 있던 외국인 신부들도 풀려 나와 본래 임지로 돌아가게 되는데, 서울의 주교관이 그같은 이동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전원 추방당하는 비운을 맞았던 미국계 메리놀전교회 신부들도 1946년 5월 이후 점차 조선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의 임지인 평양교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두가 서울로 귀환하였고, 1946년 5월부터 1947년 4월까지 귀환한 메리놀회 신부들은 모두 명동대성당에 체재했다.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서울로의 귀환이동은 미군정의 실시와 맞물리면서 남한교회 내에서 선교부들의 상대적 비중과 영향력의 구도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파리외방전교회와 골롬바노회의 영향력과 비중이 감소하였고, 베네딕도회의 남한교회에 대한 영향은 거의 전무하게 되었던 데 비해, 비록 하나의 교구도 책임지고 있지 않았지만 메리놀회의 영향력과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연길교구 및 북한지역 교구들과의 교류가 크게 약화된 것을 제외하고 해방으로 인한 교구체계의 변화는 전혀 없었지만, 교구 리더십의 내용과 성격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식민지시대 말기 일제 당국의 반(反)선교사 정책 및 일본화로의 압력에 의해 교구 리더십 면에서 상당한 인적 교체와 왜곡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그에 준하는 정도의 변화는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1946년 1월에 이르면 전국 8개 교구 가운데 4곳, 그리고 남한 5개 교구 가운데 3곳을 한국인 교구장이 채우게 되었다. 일제 말의 탄압 그리고 해방 후의 교회 재건 과정은 교구장의 ‘한국화’ 내지 ‘방인화(邦人化)’라고 하는 의미 있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에서 교구장의 방인화는 한국 천주교회가 ‘해방정국’으로 불려지는 한국사회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면서 영향력을 급속히 증가시킬 수 있었던 동력 중 하나였다. 나아가 38도선으로 인한 임시적 분단상황으로 인해 서울교구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재건 내지 정상화 과정에서 서울교구는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로 인해 서울교구 그리고 주교좌로서의 명동대성당의 상대적 중요성은 해방 후 더욱 증가되었다.
2. 남한지역 교회 중심부로의 성장
(1) 남한지역 교회와 명동대성당
해방 후 서울교구가 남한 가톨릭 전체의 확고한 중심역으로 부상함에 따라 주교좌인 명동대성당은 오늘날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와 유사한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우선, 1930년대 이후 서울과 원산, 대구, 평양 등을 순회하며 열리던 주교회의는 해방 후부터는 명동대성당의 주교관으로 회의 장소가 거의 고정되다시피 하며, 이런 상황은 195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명동대성당은 이 시기에 남한지역 교회를 위한 새 사제들을 탄생시키는 요람이기도 하였다. 해방 후 한국전쟁 발발 시까지 남한지역의 서품식 13회 중 7회가 명동대성당에서 있었고, 성신대학에서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거행된 것까지 포함하면 10회에 달한다. 명동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이들의 소속 교구는 서울교구(17명)만이 아니라, 대전교구(3명), 전주교구(3명), 대구교구(2명), 춘천교구(1명) 등 남한지역 전체에 분포되어 있다.해방 후 서울시내의 가톨릭지도는 크게 변화되었다. 해방 당시 명동(종현)성당과 혜화동(백동)성당이 서울교구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가톨릭의 가장 중요한 거점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명동대성당이 소재한 중구 명동 2가 1번지 일대에는 성모병원,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천주교보육원, 성모여자기숙사, 성가기숙사, 계성국민학교, 계성여자중학, 계성유치원, 서울가톨릭합창단, 국제가톨릭부녀원조회, 메리놀회의 구호물자 배급소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울시내에는 해방 후 적어도 두 개의 주요한 천주교 거점이 새로 생겨났다. 그 하나는 1946년 8월 이후 소공동 74번지에 자리잡은 대건인쇄소와 경향신문사였고, 또하나는 1947년 10월 이후 교황사절관이 소재했던 궁정동이었다. 1949년 4월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의 설립을 주교회의에서 결정함으로써 교황사절관에는 동 위원회가 함께 자리잡게 되었다. 해방 후 경향신문사-대건인쇄소, 교황사절관-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의 등장으로 인해 명동-소공동-궁정동을 잇는 강력한 ‘가톨릭 축’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모두 명동대성당, 혹은 1947년 6월 명동본당으로부터 분립된 사직동성당의 관할에 속했다. 특히 경향신문사와 대건인쇄소는 서울교구가 직접 경영하였고, 인적으로도 명동대성당에 자리잡은 고위 사제들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해방 후 명동대성당의 반경이 소공동으로까지 확장된 형국이었다.
명동대성당이 지닌 한국교회의 구심으로서의 상징적, 실제적 역할을 더욱 강화시켜 준 몇 가지 추가적인 계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해방 후 「경향잡지」와「가톨릭청년」이 복간되어 명동대성당에서 계속 발간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1947년 3월에는 오로지 명동대성당 신자들만의 힘으로 출판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즉 이때 명동대성당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본당 내에 ‘종현가톨릭출판사’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종현가톨릭출판사는 지방교회들의 대금 미납과 외상 거래로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게 됨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현재까지도 가동되었다. 해방 후 창립된 전국 혹은 교구 수준의 사도직단체들 중 상당수가 명동대성당에 본부를 마련했다. 1946년 창립된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 1947년 4월 창립된 ‘방지거 사베리오회’, 1947년 7월 명동대성당에서 창립된 ‘전재(戰災)교우회’, 1949년 11월 명동대성당에서 창립된 ‘천주교평양교구신우회’는 모두 명동대성당 혹은 성모병원 구내에 사무실을 두었다. 1940년대 후반에 창립되었으면서도 별도의 사무실이 두지 않았던 교회단체들 역시 명동대성당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명동대성당을 주된 활동의 장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 단체들은 노 주교, 김철규 신부, 윤을수 신부 등 명동대성당의 고위 사제나 명동대성당 평신도 지도자들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놓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의 명동대성당은 마치 오늘날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담당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한국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지도와 조정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2) 교회의 분단과 명동대성당
해방과 건국의 역사는 곧 민족 분단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또한 민족 분단은 교회의 분단을 그 일부분으로 포함하는 것이었다. 남한지역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당시의 서울교구와 명동대성당은 이 과정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서울교구는 38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상당 기간동안 교구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노기남 주교는 38선으로 인한 교류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사리원본당의 박우철 신부로 하여금 교구장 권한을 대행하도록 했다.이런 상황에서 1946년 11월 21일 명동대성당에서 노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황해도 은율 출신의 전덕표 신부는 뒤이은 서울교구 사제 인사에서 사리원본당 보좌신부로 임명되었고, 그는 38선을 월경하여 임지로 부임하였다. 전덕표 신부를 굳이 박우철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는 사리원본당의 보좌신부로 보낸 것은 관할지역인 황해도지역 교회들에 적극적으로 치리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교구장의 의지가 반영된 처사였을 것이다. 두 번째로, 「경향잡지」와 노기남 주교를 중심으로 한 연길 및 덕원교구에 대한 원조운동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경향잡지」는 몇 차례에 걸쳐 연길교구의 주교와 신부들의 어려움을 보도한 이후 1947년 3월경부터 본격적으로 구제금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경부터는 이북교회 원조운동이 연길교구만이 아니라 덕원교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고, 대체로 1948년 말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 주교는 이 운동의 초기에 1만원을 기부하였고, 공문을 통해 교구 신부들에게 연길과 덕원교구를 위한 기구와 의연을 권고하였다. 세 번째로, 당시 서울교구는 월남한 북한지역 교구(특히 평양교구와 연길교구) 소속 신부들과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였다.
(3) 한국교회 신심운동과 명동대성당
해방 후 한국교회는 특별히 성모신심과 순교신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노기남 주교 등 교회 지도자들은 해방과 독립, 건국의 과정을 한국교회의 주보 성인인 성모께서 보살핀 결과로서 해석했다. 예컨대 1941년 12월 8일 ‘한국교회의 수호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한국의 독립을 구체적인 가능성으로 열어 준 계기가 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는 점, 194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점, 1945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에 미군이 조선에 진주하기 시작했다는 점, 1948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독립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 1948년 12월 8일 ‘한국교회의 수호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유엔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했다는 점 등을 특히 강조하였다. 1947년 6월 서울시내에서는 해방 후 처음으로 명동본당으로부터 사직동본당이 분립할 때 이 성당의 주보가 ‘파티마의 성모성심’으로 정해진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한편 해방 후 교회의 상하 모두에서 순교신심운동 또한 상당히 활성화되었다. 무엇보다도 1946년은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1950년은 79위 복자 시복 25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이 때를 전후하여 순교신심운동이 크게 고조되었다. 순교신심운동에서도 서울교구와 명동대성당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일인 1946년 9월 16일에 한국 가톨릭 순교신심운동의 구심으로서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재발족되었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지적했듯이 이 단체의 중앙위원회가 명동대성당 내에 자리잡게 되고, 그 위원장으로 명동대성당에서 서울교구 출판부 책임자로 있던 윤형중 신부가 선임되었다. 또한 1947년 이후 명동대성당 신자들은 매년 9~10월에 순교신심을 표출하고 고양시키기 위한 다양한 행사들을 벌여 나갔다. 유 베드로 치명극 각본의 배부(1947. 10), 종현청년회의 영화 ‘왕중왕’ 상영(1948. 9), 복자첨례에 즈음한 9일 기도(1949년), 새남터 순교기념탑 건설을 위한 종현여자청년회의 기부(1950. 2)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4) 에큐메니칼운동과 명동대성당
한국사회에서 격렬한 좌우익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동안, 가톨릭을 포함한 우익 종교집단들간에 광범한 공동전선이 형성되었다. ‘대한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회’의 결성(1945.12)과 활동, ‘기미독립선언 전국대회’(1946.3, 이후 매년), ‘남북통일촉성 종교단체연합회’(1949.3) 등은 가톨릭, 개신교, 불교, 유교, 천도교, 대종교 등 6대 종교를 주축으로 한 것이었다.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컸던 종교간 협력운동의 사례는 매년 거행된 ‘기미독립선언 전국대회’였다. 1946년의 ‘기미독립선언 3․1 전국대회’에는 가톨릭 대표로 명동대성당 신자인 남상철이 재정부장으로 참여하였고, 남상철은 1947년 대회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대회가 끝난 후의 폭력시위의 주동자로 구속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도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1946년 4월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공동으로 남산 신궁(神宮)터에 기독교박물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독립기념 조선기독교박물관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에는 노기남 주교가 부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 7개 교파 대표들로 구성된 양 종교의 지도자들은 또 “무신유물(無神唯物)의 사상이 미만”한 상황에 공동으로 대처하면기 위해 ‘그리스도교도연맹’을 결성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1947년 7월 7일에 종로 YMCA회관에서 ‘전국기독교도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의 의장에는 장로교의 함태영 목사, 부의장에는 천주교의 남상철이 선출되었고, 남상철은 동 연맹의 회장단에 포함되었다.전체적으로 볼 때 해방공간에서 가톨릭교회가 타종교들과 형성한 관계는 상호적인 이해와 협조가 지배적이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로 좁혀 볼 경우, 한국전쟁 이후에 양자간의 관계가 경쟁과 긴장으로 특징 지워진다면, 한국전쟁 이전의 관계는 상호이해와 협력의 측면이 보다 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노기남 주교와 평신도인 남상철 등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타종교들과의 협력운동에서도 명동대성당의 중심적인 지위를 재확인할 수 있다. 특히 혜화동본당을 대표하는 평신자였던 장면이 가톨릭교회의 정치 참여의 핵심적인 매개역이었다면, 타종교와의 협력에서는 명동대성당을 대표하는 평신자인 남상철이 핵심적인 매개역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5) 사회복지와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은 해방 후 가톨릭 사회복지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성모병원이 바로 명동대성당에 위치하고 있었고, 해방 후 더욱 두드러진 발전상을 보여주었다. 1947년 4월 중순에는 성모병원 원장으로 명동대성당의 지도적 신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던 박병래의 주도로 가톨릭 의료인들의 모임인 ‘방지거 사베리오회’가 창립되어 명동 성모병원 내에 연락소를 두었고, 비신자인 환자들을 상대로 “의료사업을 통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명동대성당 구내에는 성바오로수녀원이 경영하는 천주교보육원도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메리놀회가 관할하는 미국교회로부터의 구호물자 배급소가 명동대성당 구내에 있었다.이로 인해 해방 후 명동대성당은 이른바 ‘전재민’ 구호사업의 가톨릭 중심지로 부상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급박한 사회적 필요에 가장 잘 부응하는 것이었다. 명동의 구호물자 배급소는 1947년 2월 ‘미국가톨릭복지회(NCWC)’ 산하 ‘가톨릭구호서비스(CRS)’의 한국지부였던 셈이고, 전쟁 발발 이전에는 명동대성당에 사무실을 두었다가 이후 종로구 운니동으로 옮기게 된다. 전재민 구호와 관련하여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대목은 1947년 7월 초순에 탄생한 ‘가톨릭전재교우회’의 조직과 활동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단체는 명동대성당에서 조직되었고, 사무실도 명동대성당 내의 경향잡지사에 위치해 있었다. 이 단체의 총재는 노기남 주교가 맡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는 명동 신자인 남상철이 선출되었다. 노기남 주교는 1947년 10월경 명동의 김철규 신부를 전재교우회의 지도신부로 임명하였다. 비록 일회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명동대성당의 여러 사도직단체들도 사회복지 사업에 참여했다.
3. 해방정국과 명동대성당
(1) 미군정과 명동대성당
미군의 진부 직후부터 서울교구는 미군정 당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형성했고, 명동대성당을 중심으로 하여 군정 고위 장교들과의 친밀한 유대를 지속했다. 미군 군종사령관이자 뉴욕대교구 교구장이었던 스펠만(F. J. Spellman) 대주교가 집전한 명동대성당에서의 미사(1945. 9. 9), 나이스터 준장의 부탁으로 노기남 주교가 군정측과 협력할 한국인 지도자 60명을 추천한 일(9.12), 노기남 주교의 하지 사령관 예방(9.18), 명동대성당에서 있은 노기남 주교 집전의 세계평화 회복 감사 미사와 미군장병 환영식(9. 26), 명동대성당에서 있은 노기남 주교 집전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모든 미군의 영혼을 위한 미사(11.1) 등이 이와 관련된 주요한 일들이었다. 또 미군정 성립 이후 미군과의 교류는 명동대성당의 매주일 미사를 통례 정례적으로 유지되었다. 1946년 10월 현재 명동대성당에서는 매주일 오전 9시 30분과 오후 4시에 미군을 위한 미사가 있었다. 특히 1946년 9월 귀국할 때까지 초대 군정장관과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를 지낸 아놀드 소장은 가톨릭 신자로서 매주 명동대성당의 주일미사에 참여하였다.메리놀회 소속의 미국인 선교사들 또한 미군정 당국과 한국교회의 협력적 관계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들의 활동 역시 명동대성당과 관련이 깊었다. 이미 서술한 바 있듯이, 1947년 5월까지 메리놀회 신부들은 모두 명동대성당에 체류하면서 한국교회와 군정 당국 사이의 여러 업무를 맡아보았다. 또 1947년 10월 이후 방 신부는 교황의 공식적인 외교사절로서 미군정과 교회의 관계를 매개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선교사들은 1947년 3월부터 9월까지 매주 1회씩 군정장관과 정례적인 만남을 가졌다.
(2) 우익 정치세력 및 초기 이승만정권과 명동대성당
가톨릭교회와 우익 정치세력의 협조적 관계는 명동대성당을 축으로 해방 직후부터 형성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 주교의 권유로 우파를 대표하는 ‘한국민주당’에 명동대성당의 지도급 신자인 조종국과 박병래를 포함하여 가톨릭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해 11월 30일에는 환국한 이승만의 의미깊은 노기남 주교 방문이 있었다. 며칠 후인 12월 8일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이 달 1일 귀국한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을 환영하는 미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환영식’이 있었다. 1946년으로 접어들면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활동은 더욱 선명하고 적극적인 것으로 변모되어 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46년 2월 1일 김구의 임정계와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 중앙위원회가 합세하여 소집한 ‘비상국민회의’가 바로 명동대성당에서 열린다는 사실이다. 명동 대강당을 이른바 ‘우익 민족진영’에게 기꺼이 개방한다는 것이 당시 명동대성당의 기본 방침이었다.1947년 봄 이후 가톨릭교회는 이승만의 ‘남한 단정수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교황은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기 거의 1년 전인 1947년 7월에 자신의 사절을 한국에 파견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분단정권의 수립을 조장했다. 가톨릭교회는 또한 「경향신문」과 「가톨릭청년」을 통해 이승만의 단정수립운동에 대립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던 중간파 정치세력들을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1948년으로 접어들면서 가톨릭 지도자들은 남한 정부 구성을 위한 총선거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1948년 1월 명동 계성여중에서 ‘가톨릭시국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이 단체의 위원장으로는 명동대성당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였던 조종국이 선출되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 해 2월 중순 노기남 주교는 교구 내 각 교회에 공문을 보내 명동의 김철규 신부를 교구 내 가톨릭운동 지도자로 임명하며, 각 교회에서는 모든 교우들을 남녀별, 연령별로 조직하도록 독려하였다. 교회는 신자들의 출마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였고, 신자 후보들의 당선을 위해 언론매체들과 교회조직을 총동원한 대대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가톨릭교회와 이승만정권의 협조관계는 계속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가톨릭 정치가’인 장면에게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한국정부의 승인을 받아 오는 중책을 맡겼고, 돌아오는 길에 장면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은 장면이 주미대사직을 수락하도록 설득하는 데 노기남 주교의 도움을 받았다. 1949년 봄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그 해 8월 말 명동대성당 대강당에서는 “대외적으로는 입법, 행정, 교육, 산업, 문화 각 방면을 통하야 가톨릭정신을 보급하며 실천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조국재건에 철저히 이바지”하기 위하여 ‘대한천주교총연맹’이 결성되었다. 연맹의 총재는 노 주교, 부총재는 김철규 신부가 맡았고, 각 교구의 주교와 교구장들이 고문으로 포진하였다. 1950년 1월 중순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연맹의 제1회 대의원회의가 열렸다. 1950년 5월 30일에 있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각 교구별로 신자 후보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활발한 선거운동이 펼쳐졌다. 신생 정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또 그와 협력하고자 하는 가톨릭교회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간략히 살펴본 대로, 해방정국에서 가톨릭교회가 주도한 정치성 행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명동대성당을 무대로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명동대성당은 해방 후 고도로 활성화된 ‘가톨릭 정치’의 심장부였다. 그리고 그 주역들 역시 ‘명동대성당 사람들’이었다. 노기남 주교, 김철규 신부와 윤을수 신부 등의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조종국, 박병래, 남상철 등의 평신도가 우선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조종국과 박병래가 한민당에 참여한 경우라면, 남상철은 한민당과 함께 양대 우익 정당을 이루는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4. 명동대성당의 조직적 발전과 신자들의 신앙생활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시기에 명동대성당은 조직이나 신자들의 신앙생활 면에서도 중요한 성장을 경험했다.
이것은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성숙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양적인 성장은 활발한 본당 분할과 신설에서 잘 나타났다. 명동본당은 해방 후 5년 동안 무려 세 번의 본당 분할을 거듭하고 있는데, 해방 후 서울시내에서 신설된 모두 다섯 곳의 본당 가운데 세 본당이 명동대성당을 모태로 탄생했던 것이다. 명동대성당의 각종 사도직단체들도 이 시기에 두드러진 발전상을 보여주었다.명동가톨릭청년회는 1946년 7월 서울교구 청년연합회의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부회장[조종국]과 보건부장[박병래]을 맡는 등 이후의 과정에서도 중심 역할을 계속했다. 교구청년연합회는 회장과 부회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정계로 진출하는 등 정치운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으나, 연합청년회의 제1회 묵상회(1949. 6, 명동 주교관), 서울교구 청년연합회의 하계 가톨릭대학 강좌(1949. 8, 명동 대강당) 등을 비롯하여 성탄과 부활, 복자첨례를 전후하여 다양한 신앙행사들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1946년 8월 명동에서 결성된 가톨릭여자청년회연합회에서도 명동가톨릭여자청년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며, 이 단체는 전교에 주력하기로 한 점에서 정치화된 남자청년회와 대조적이었다. 한편 명동대성당은 별도의 학생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명동대성당의 보좌신부가 남․녀 청년회와 함께 남․녀 학생회의 지도를 맡고 있었으며, 더욱이 학생회가 벌이는 대부분의 행사들이 명동대성당을 무대로 진행되었다. 특히 성가기숙사와 성모여자기숙사는 비신자인 학생들까지 일부 수용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전교활동을 벌임으로써, 중학생과 대학생 등 예비 지식인들의 가톨릭 입교의 창구로 기능하였다.
명동 신자들의 단체활동과 관련하여 1947년 봄에 창립된 ‘성요셉회’를 빠뜨릴 수 없다. 이 회는 18~30세까지의 남성 독신자로 수도자처럼 덕행을 닦으며 일생을 교회에 헌신 봉사할 신자들로 구성되었다. 창립 당시 5~6인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며, 소속 본당신부의 추천을 받아 명동 본당신부에게 입회 원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명동 ‘성모자비회’의 활동 역시 당시 교계의 주목을 받았던 단체였다. 이 모임은 대부분 50세 이상의 노령기 부인들로 구성되었는데, 전교를 주목적으로 삼았고 이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1939년에 창립된 ‘서울가톨릭합창단’ 또한 명동대성당의 대표적인 평신도단체였다. 특히 1948년의 성탄축하 대합창 공연 당시 단원이 무려 150명에 달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음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문근 신부가 해방 이후 1947년 9월까지 명동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이 합창단을 지도했다.
해방과 함께 명동대성당은 지식인층의 입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46년에 처음 시작된 ‘가톨릭교리강좌’가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강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1948년부터 춘계강좌와 추계강좌로 연 2회씩 개설되었다. 강좌가 워낙 지식인층의 입교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대개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로 청강 자격이 제한되었다. 강사는 명동 보좌신부들이 맡았는데, 이를 통해서도 당시 명동 보좌신부들의 지적․신학적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명동의 가톨릭교리강좌가 대단히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1949년경부터 다른 교구와 본당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단기 혹은 중기 강좌들을 앞다투어 개설하였다. 지식인들을 겨냥한 또다른 프로그램은 매년 사순시기에 6주간 계속된 ‘사순절 특별강론’이었다. 이 일련의 연례 강의는 비록 명동대성당의 행사이기는 했지만, 범교구적인 관심과 참여 속에 진행되었다.
명동대성당에서 해방 후 새로 시작된 또하나의 종교행사는 유아세례를 받은 소년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영세허원 재신식’이었다. 영세허원 재신식은 한국에서는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1944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두 번째로 명동대성당에서 1946년부터 시작한 것이다. 1948년 이후에는 이 예식이 전주성당, 중림동성당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1950년 초에 출간된 「미사공과」에는 영세허원 재신식의 절차와 내용이 자세히 소개되기에 이른다. 명동대성당의 내적․외적 발전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명동대성당 축성 50주년’인 1948년을 전후한 일들이다. 우선, 1947년 10월부터 이듬해 상반기까지 명동대성당 신자들은 성당 축성 50주년을 앞두고 성당을 수리하고 종각에 피뢰침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948년 6월 2일에는 명동대성당 축성 50주년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이 날 오전 기념 대미사가 있었고, 오후에는 공로자 표창 등을 포함하는 기념 축하식과 성모상 제막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