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현황과 주교좌로서의 명동대성당을 소개합니다.

명동대성당의 역사

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1. 서울의 신앙공동체와 주교좌 명동본당




17세기 초엽부터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한문서학서에 대한 연구는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영조 말엽까지 150여 년 동안 진행되었다.

그들 중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檗) 등 일군의 기호(畿湖) 남인학자들에 의해 천주교가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단지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는 학문적인 관심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진리에 대한 갈증과 인생의 해답을 얻으려는 구도심(求道心)에서 천주학을 대하고 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정조(正祖) 元年(1777) 겨울, 천주교 교리에 관한 강학회(講學會)가 그 발단이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천주교 서적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조석(朝夕)의 기구(祈求), 주일(主日)과 파공(罷工), 금육재(禁肉齋) 등 그들이 천주교에 관하여 알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비밀리에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실천은 이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계속하지 못하였다. 이벽 역시 몇 권의 천주교 서적에서 얻은 천주교에 관한 지식과 개념이 아주 모호하고 불충분하였으므로 천주교에 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북경으로부터 보다 많은 천주교 서적을 구할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던 중 그의 친구 이승훈(李承薰)이 계묘년(癸卯年, 1783) 동지사행(冬至使行)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그의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그에게 북경(北京)에 있는 천주당(天主堂)을 찾아가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 행위를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도록 부탁하였다.

이벽의 부탁으로 북경에 도착하여 선교사들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이승훈은 1784년(甲寅年) 1월 말, 귀국을 앞두고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으며, 귀국할 때 많은 천주교 서적과 십자가, 상본과 성화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승훈은 3월 24일경(음력) 서울에 도착한 직후 이 책들을 이벽에게 전달하였고, 이벽은 수표교(水票橋, 현재는 水標橋로 표시)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이 교리서들을 신중하게 검토하였는데, 그는 이승훈과 함께 이 책들을 통해 교리를 연구하면서 비로소 천주교 교리에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이벽은 1784년 9월 세례자 요한이란 본명으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즉시 자신의 집과 주변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천주교의 전교 활동을 벌였는데, 당대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몇몇 양반 학자들 뿐 아니라 초기 교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중인(中人)들을 입교시켰다. 그리고 신도들이 늘어나면서 역관(譯官) 김범우가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자 자연스럽게 명례방으로 옮겨서 신앙 집회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명례방 공동체는 집회를 가진 지 몇 달 만에 추조(秋曹)의 형리들에 의해 적발되어 집 주인 김범우가 형벌과 유배를 당함으로써 마감하게 되었고, 조선 천주교회 공동체는 처음으로 시련을 당하게 되었다. 이 시련 속에서 김범우와 이벽이 사망하였고, 이승훈 등 양반집 자제들은 가문의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조선 천주교회 신도 공동체는 정부와 가문(家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불어난 신도들의 신앙을 올바로 지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승훈은 북경 교회에서 보았던 것들과 신자용 예절서나 교리서에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빌어 교계제도를 만들기로 하고, 이전에는 이승훈과 이벽에 의해서만 집행되던 성사를 집전할 목자(牧者)들을 선정하였다. 그리하여 1786년 봄 신도들과 협의하여 신심과 학식, 그리고 덕망이 높은 신도 10명을 뽑아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맨 먼저 이승훈이 신부로 선출되고, 그가 권일신(權日身), 홍낙민(洪樂敏, 루가), 최창현(崔昌顯), 이존창(李存昌, 곤자가의 루도비꼬),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 등을 신부로 임명했다. 가성직제도가 설정된 당시 가성직자들 모두가 고해성사의 집전권을 받았으며, 그 해 가을 신도들의 권유에 따라 이승훈만 견진성사와 미사성제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이승훈은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미사성제를 거행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 ‘가성직제도’는 신자들의 무지로 인한 잘못으로 밝혀져 중단되기는 하였지만, 교회사상 유래가 없는 것으로 그 시작과 중단의 동기가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었다는 것은 선교사도 성사의 혜택도 없이 시작된 초기 신앙공동체의 열성과 갈증을 밝혀주는 것으로 올바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처음으로 당한 시련 속에서 흔들리던 신자들의 신앙을 굳게 하고 복음전파를 더 쉽게 하기 위하여 가성직제도를 시행하기로 함으로써 이를 통해 평신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자공동체의 질서가 확립될 수 있었고, 비정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성사가 집전됨으로써 적어도 10지역에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 유지될 수 있게 됨으로써 훗날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빠른 시간 내에 교회 조직을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가성직제도가 중지된 이후 조선 천주교회 신도들은 성직자 영입을 추진하게 되었고, 그 결과 북경교구에서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최초의 선교사로 파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교회는 북경교구 소속의 한 사목구(司牧區)로 관리될 수 있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에는 초창기의 교회 조직이 좀 더 체계화되었는데, 총회장에 의해 신도 조직을 관리하고 명도회를 통해서는 예비자 교육과 신도 재교육 등 전교 활동을 하였으며, 전례나 종교 집회는 약방(藥房)을 운영하는 신도들의 가정이나 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꾸민 신도들의 가정 등에서 거행하였다. 여기서 주문모 신부가 주로 거처하면서 머물던 강완숙의 거처와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주 신부가 각지로 이동해서 머물던 곳을 본당과 공소의 형태로 구분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주문모 신부는 박해의 위험을 피해 소수의 공동체[가정 단위]를 전전하면서 성사 집전과 전교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회장과 공소, 명도회 조직 등을 통해 본당의 구역 조직과 공소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적인 교회 모습이 형성됨으로써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무렵 약 4천명이던 신자가 몇 해 후에는 1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신유박해(1801년) 무렵의 서울지역 신앙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던 신도들의 신분을 살펴보면, 대체로 양인(29.34%)과 중인(21.37%) 신분층이 전체 신도의 반 이상을 이루고 있으며, 아전, 의원, 소상인, 수공업자들이 의외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양반들과 중인이 주축이 되어 시작하였던 ‘서울 신앙공동체’는 도시인들의 교회인 동시에 시민․시정인(市井人)의 교회로서의 특징, 즉 민중 종교 운동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신유박해 이후 소강 국면에 접어든 교회는 가정 중심의 소공동체였기 때문에 가정을 통해 전파된 신앙이 2세대에 전파되면서 회복되어 나갔다.

그리고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면서 신도들의 조직을 정비하였고, 줄기차게 성직자영입운동을 벌인 결과,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가 설정됨으로써 세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 역시 한 명의 성직자도 없는 상태에서 이룩된 것인데, 이는 평신도에 의해 이룩된 조선 천주교회의 기적적인 탄생을 전체 교회 차원에서 인정한 획기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변방 속국처럼 여겨지고 있던 조선의 존재를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독립된 국가로 인정한 최초의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대목구의 설정은 교회 내적인 측면에서도 신생(新生) 조선교회가 확고한 기틀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교회의 최고 결정권자인 교황에 의해 내려진 이 결정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불안정하여 조선교회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북경교구로부터 벗어나, 전체 교회 차원에서 선교사 파견과 교회 관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조선교회를 위한 안정적인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대목구로 설정된 조선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직자를 양성할 수 있는 교구장주교와 조선교회를 책임진 파리외방선교회의 협조 아래 체계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교구장주교와 선교사들이 입국하여도 공식적 또는 공개적인 선교가 불가능한 지하교회의 시대가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외형적인 면에서 서울 신앙공동체의 형태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없었고, 서울 지역공동체 또한 여전히 초기 교회 상황과 같이 신자 가정을 이용하여 소규모로 신앙 집회를 하는 형태가 유지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이 입국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는 비로소 체계를 갖추면서 조직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선교사들은 신자들이 있는 조선의 방방곡곡을 방문하면서, 가는 곳마다 회장(會長)들을 임명하거나 승인하고, 어린이 대세(代洗)와 혼인, 장례, 주일과 큰 축일의 집회, 싸움과 소송의 판단 등, 한마디로 가장 긴급한 모든 것에 관한 규칙을 정해 줌으로써 신자 집단의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보충하였다. 그리하여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을 당시 6천 여명이었던 조선의 교우 수는 세 선교사가 입국한 이후 급격히 늘어 1838년 말에는 9천명이 되었는데, 이 가운데 서울의 교우 수는 1천 여명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몇몇 교우 가정에서 모이는 신앙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대표적인 곳은 주교댁으로 이용되었던 정하상의 집과 남명혁․이광렬 등 회장들의 집이었다. 또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조선인 사제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마카오에 3명의 신학생들이 파견되었고, 국내에서도 박해의 위협 속에서 앵베르 주교가 직접 신학을 가르치며 사제 양성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이 시기의 조선대목구는 주교․사제․신학생 및 회장과 교우 등 인적인 체계는 제대로 갖추어 질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교구 내에 본당과 공소라는 공식적인 사목 지역은 박해 중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설정할 수 없었다.
조선대목구의 설정으로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조선교회는 다시금 1841년 8월 22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원죄 없이 잉태되신[無染始胎] 성모 마리아를 성 요셉과 함께 교회의 주보(主保)로 인정받음으로써 북경교구로부터 신심적인 독립도 이루게 되었다. 조선대목구 주보(主保)의 설정은 박해 중에 있던 신자들의 신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이후 단순히 의무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덕을 쌓고 사회 안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살아나가기 위한 다양한 신심단체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초기 교회 때부터 그 무렵까지 신자들이 바치던 주요 기도문들은 거의 한자의 중국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해서 외우던 것이었는데,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등 조선인 사제가 귀국하면서, 늦어도 『다블뤼 비망록』이 작성되던 무렵에는 한글로 완전하게 번역된 기도문들이 사용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선교사들이 조선 천주교회를 관리하게 되면서 초기 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전통에 따라 자체적으로 조직, 운영되어 오던 모든 체계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필요한 규칙들이 정해지면서 보편 교회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또 선교사들 사이에도 본당 조직과 같은 책임 구역이 정해지고 임무가 분담되면서 체계화되었고, 보다 효율적으로 선교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서울 지역에서의 천주교신자들의 활동은 대원군(大院君)이 집정하자 조정의 정치적인 상황까지 잘 파악하여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직접 건의하기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때 서울 지역의 신자들의 의식은 매우 대외적이고 국제적인 활동으로 일관되고 있다. 서양 선박을 통한 성교회의 자유 획득은 물론이요 다분히 정치적인 의식을 가지고 통상과 외교적인 문호 개방에 대하여도 대단히 적극적인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신자들의 이러한 정치적인 접근 때문에 결국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초래하게 되었다.

병인박해 이후 바뀌어진 국제 정치 상황 속에서 조선이 외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천주교 역시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는 단계를 거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회는 각지에 본당을 설정하여 교회 조직을 정상화시켜 나가는 한편, 초기 교회 때는 복음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박해 상황 속에서도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이웃을 보살피던 애덕 행위 역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이제는 조선 천주교회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회복지사업으로 확대되었으며, 교육이나 출판․문화․의료 사업 등도 사회 계몽과 변혁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의 복음선포(福音宣布) 행위로 전개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성직자들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고 교회를 올바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신도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는데 이를 위해 성직자들은 공소회장이나 전교회장 등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지침서들을 발간하여 그들의 역할을 분명히 해 주면서 꾸준히 교육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신도들의 협력은 교회 창설 때부터 한국 천주교회가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이루어졌고, 오랜 박해 동안 교회를 지탱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미 평신도 사도직의 훌륭한 전통을 유지시켜왔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빠른 시간 내에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협조 체제 아래 교계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된 한국 천주교회 모든 신자들의 의식 한 가운데 ‘서울의 신앙공동체’, 특히 이벽과 이승훈에 의해 시작된 ‘명례방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고, 이 공동체가 탄생한 지역에 조선대목구 주교좌본당이 설정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을 다시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례방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의 까따꼼바이고, ‘명동본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바티칸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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