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3. 식민지 시대 명동대성당의 위치와 역할
1. ‘한일합병’ 이후 명동대성당의 교세 둔화
1882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설정된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며 총본산이다.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된 이후 서울교구의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 : Cathedral)으로 그 지역적 역할 범위는 축소되었지만,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성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명동대성당에서 전개되는 활동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으로 이해된다.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성당이라는 점에서 일제의 천주교회 규제 내용과 방법이 가장 먼저, 그리고 표본으로 시행되는 곳이었다. 또한 서울교구의 주교좌성당이고, 지정학적으로 서울교구의 주교관과 같은 경내에 위치하므로 서울교구장의 사목지침이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심도있게 실현되는 무대였다. 그런데 1941년 말까지도 서울교구장은 프랑스인 선교사였다. 또한 명동대성당의 주임신부도 1941년까지는 프랑스인 선교사였다.개항 이후 한국이 해결해야 할 두 가지의 큰 문제는 반봉건과 반침략이었으며 이 과제는 일제 식민통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선교를 우선으로 하였던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민족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한국인 신자들의 반침략운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이후 재한선교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제에 식민통치당하는 한국인 신자들의 민족적인 처지가 아니라, 한국의 실질통치권자인 일제통치권자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선교에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일제하 명동대성당은 신자 구성원들인 한국인 신자들, 명동대성당을 관할하는 프랑스인 선교사들, 그리고 종교단체도 그들의 식민통치에 이용하려 하였던 일제의 종교규제정책 속에서 질곡의 시간을 엮어가게 되었다.
한국의 국권이 탈취당하였을 때 명동대성당은 서울교구의 주교좌성당이므로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의 관할이었으며, 실질적인 사목담당자는 프랑스인 성직자 포와넬(Poisnel, 1855-1925) 신부였다. 그런데 뮈텔 주교는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우고 성속이원론에 입각한 신앙을 강조하였으며, 뮈텔 주교의 그러한 태도는 명동대성당의 주임신부를 통해 명동대성당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신자들의 친목 모임까지도 성당 안에서 행해지는 모임은 성직자가 관할하였다. 1913년 5월 명동대성당의 친목회는 ‘천주교우친목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성직자가 총감이 됨으로써 모임에 신자들의 자율성이 배제되었다. 또한 모임의 목적은 성경 공부로 한정되었다. 선교사들에게 제일의 목적은 선교였고, 민족이 다른 선교사들에게 한민족과 같은 민족 감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한민족의 민족 정서를 이해하기보다 교회 우선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1913년 5월 25일 명동대성당에서 처음으로 거행된 성체거동은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웠던 천주교의 방침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성체거동의 목적이 성체 신심을 강조하고 천주교를 선교하는 데 있었다지만 성체거동을 위해 성당에 내건 교황기와 프랑스 국기는 천주교회의 그러한 설명을 빈곤하게 만든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에 위치한 명동대성당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것은 식민통치자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1918년 11월 17일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뮈텔 주교의 성체강복식은 프랑스가 참여하였던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3월 1일 한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한국인들이 거족적으로 전개한 3․1 운동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독립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천주교회가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일제에 좋은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하였다. 멀리 유럽에서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데 감사하고 전후 유럽을 위해 주일과 축일에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도록 하는 사목교서(司牧敎書)를 반포하면서도, 그가 선교하고 있는 한국이 당면한 문제는 전혀 이해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뮈텔 주교가 거처하는 주교관과 같은 경내에 있던 명동대성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당신부였던 포와넬 신부도 교구장 뮈텔 주교와 마찬가지였는데 한국인 신자들은 제도교회와 성직자들에게 맹목적이다시피 순종하였다.
일제당국이 공포한 포교규칙,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우며 민족문제에의 참여를 금지하였던 성직자들의 선교지침은 일제에 국권이 탈취당한 이후 감소하던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증가율을 더욱 감소시켰다. 1900-1910년 5.65%이던 신자증가율은 1910년부터 1919년의 3․1 운동까지는 2.10%로 하강곡선을 그렸다. 명동대성당은 한층 심한 타격을 받았다. 1910-1915년 100여 명까지 이르던 세례자 수가 1916년부터는 20여 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세례자의 감소는 곧바로 신자수에 영향을 미쳤다. 1900년 1,161명이던 명동대성당의 신자수는 1910년 1,637명을 기록하여 476명이 증가함으로써 연평균 47명의 신자수 증가에 41.0%의 신자증가율을 보였다. 그러나 1910년부터 1919년까지는 75명이 증가하여 연평균 약 8명의 신자수 증가에 4.58%의 신자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증가율은 1900년부터 1919년까지 5.65%에서 2.10%로 감소하여 약 1/3로의 감소를 보였는데, 명동대성당의 신자증가율은 41.0%에서 4.58%로 감소하여 1/10로의 급격한 감소를 보였다.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명동대성당에 훨씬 강력하게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응하는 천주교회의 태도가 한국인들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3․1 운동 이듬해 여름, 폭우로 명동대성당과 성당 인근에서 발생한 수해로 벌어졌던 사건은 명동대성당에 대한 민심이 얼마나 악화되어 있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1920년 8월 1일 내린 폭우는 명동대성당의 제대 뒤에 있는 화원의 서편 언덕과 그 아래의 오동나무․전나무 언덕을 무너뜨려 채소밭과 우물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많은 가옥을 흙더미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100여 평의 화원에 모인 물이 성당 안으로 들어갈까 서편 언덕에 물길을 터서 가옥이 파묻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이 나왔다. 천주교회에서는 만일 화원에 물이 고였다가 빠졌으면 그 흔적이 있을 것이며, 성당 지하실에도 물이 침투했을 것이라며 피해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 사건은 진실과 선을 추구하는 종교단체인 명동대성당이 얼마나 민심으로부터 이반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2. 1920년대 성당 부속건물 건립과 교육사업
1924년 5월 24일 명동대성당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오르간의 가격은 9,000여 원이었는데 운송비를 포함하면 거의 만원에 이르렀다.
당시 쌀 1가마의 가격이 20원이었으니 오르간 구입에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입되었는지 알 수 있다. 1924년 12월에는 본 성당과 지하 성당에 800원의 경비로 30개의 전등을 설비하였고, 1925년에는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식을 추진하면서 명동대성당 지하실에 복자(福者)들의 유해를 안치하였다. 그리고 그해 7월 5일 79위의 순교자들이 시복되자 성당 중앙 제대 왼쪽에 1,000여 원의 경비로 치명복자 79위의 제대를 마련, 1927년 12월 18일 축성하였다. 또한 중앙 제대 뒷면에 순교자 제단화(祭壇畵)와 제단 주위에 12종도화(宗徒畵)를 마련하였다.1926년에는 계성보통학교를 2층 양옥으로 건축하고 더불어 사제관, 청년회관, 남회장 사무실, 여회장 사무실, 복사의 사택, 성당지기의 가택 등을 양옥으로 건축한 후 12월 5일 준공하였다. 성당 외에 이렇게 많은 건물들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은 1924년의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京城區天主敎會維持財團) 설립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성당과 그 대지에는 등록비가 면제되는 등 혜택이 부여되었는데 당시 명동대성당은 1만여 평의 부지에 연건평 612.61평 규모의 성당 건물과 성가 기숙사, 그리고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등 16채, 19동(棟)의 건물들이 있었는데 이들 건물의 건평 합계는 1,624평이었다. 오늘날의 명동대성당과 주변의 건물 현황표를 비교해보면 그다지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명동대성당은 학교 운영을 통하여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였다. 1906년 명동대성당의 주임인 포와넬 신부의 후원으로 최봉섭(崔鳳燮)이 설립한 서당을 1909년 명동대성당에서 인계받아 운영하였다. 또한 1922년에는 지방 신자학생들을 위해 명동대성당 경내에 성가기숙사를 건축하였다. 1930년 노기남 신부가 명동대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한 이후에는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신자학생들을 대상으로 문답과 교리공부가 행해졌다. 또한 한국어 교육이 금지되었지만 종교교육을 통하여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계성학교를 통한 교육운동이 성직자 중심의 사회활동이었다면, 양로사업은 한국인신자들이 전개한 사회활동이었다. 1924년 4월 명동대성당의 회장들은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보살피려는 목적에서 애긍회를 발족하였다. 많은 노인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고 약을 나누어 주고 죽은 후에는 매장까지 책임졌던 애긍회는 양로원 경영을 시작하여 사회봉사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명동대성당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청년회와 성모자비회도 명동대성당의 중추적인 신자모임이었다. 청년회는 가톨릭 문서운동 강연회, 수재민 돕기 운동, 애긍회 원조, 치명복자축일 기념 강연회 등을 주최하였다. 한편 중년 부인들로 구성된 성모자비회는 무의탁자들을 위해 연미사를 봉헌하였고, 1937년 경성가톨릭부인회연합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0년대 초반 청년회와 성모자비회의 활동은 성당 안에서 점차 부각되는 평신도 활동의 표상이었다.
3. 1930년대 명동대성당의 전시총동원(戰時總動員) 협력
1936년 4월 12일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부활미사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부활미사의 라디오 생중계는 신사참배 불가에서 허용으로 선회하고 있던 한국 천주교회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접근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침략정책에 천주교회가 위험스럽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미사를 생중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동대성당에서는 일본 통치자들이 우려할만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 천주교회는 부활 미사를 생중계함으로써 일제와의 관계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한편으로는 문명의 이기인 라디오를 활용함으로써 천주교 선교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명동대성당에서는 중일전쟁 발발 여드레만인 1937년 8월 15일의 성모승천축일에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였다. 이어 그해 11월 1일에는 서울의 4개 천주교 성당 연합으로 제2차 국위선양 평화미사가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경성방송국의 실황 중계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런데 황군은 일제 식민당국이 강화시키고 훈련시킨 제국주의 침략의 전위대이다. 그러므로 황군 위문행사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천주교회가 협력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1938년 7월 7일 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명동대성당을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전물장병의 영혼을 위하여,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미사 거행하였다. 이어 1938년 7월 27일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천주교경성교구가 참여하자 명동대성당에서는 주임신부와 조종국이 대표자와 담당자로 선임되었다. 이어 1939년 5월 14일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는 명동대성당의 보좌신부 노기남이 5명의 이사 중 1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장면, 박병래, 조종국, 김한수, 정남규 등이 간사로 선임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명동대성당 청년회의 핵심 간부를 역임한 이들이었다.
1942년 1월 명동대성당의 보좌신부 노기남이 서울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월 18일 노기남 신부는 명동대성당에서 서울교구장 착좌식을 하였고, 이어 이기준(李起俊) 신부를 명동대성당의 주임신부로 임명하였다. 본당 설립 60년만에 첫 한국인 주임신부였는데, 한국인 신부를 명동대성당의 주임신부로 임명하였다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를 한국인들이 관할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요구는 더욱 심해졌다. 철재(鐵材)의 심각한 부족에 당면한 일제는 명동대성당의 제대 앞 난간을 강제로 철거해 갔다. 일제는 종의 헌납도 강요하였는데 종은 종탑을 헐어야만 가져갈 수 있으며, 종을 떼어낸 후 종탑은 원래대로 해놓아야 한다며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거절하였다. 일제는 종을 가져가는 대신 종이 종각에 매달려 있는 것을 안 보이도록 가려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명동대성당에서는 송판으로 가려 밖에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일제하 명동대성당에 가해진 일제의 마지막 요구 사항은 성모병원(현 가톨릭회관) 쪽에서 명동대성당을 향해 땅굴을 파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명동대성당에서는 성당 밑에다 굴을 파게 되면 지반이 약해져 성당이 무너지게 될 위험이 있다며 공사의 불가성을 말하였지만 공사는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공사는 8․15 해방으로 중단되었다.
전시총동원정책이 시행되는 중에도 명동대성당은 교회의 내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8년 창대가 좁으므로 기둥들을 특별히 세워 창대를 넓혔다. 1939년 2월 11일에는 문화관을 준공하였으며, 그해 8월 15일에는 서울 가톨릭 합창단을 창단하였다. 신자들을 격려하여 전교에 주력함으로써 1943년 명동대성당의 여자 신자들이 이룩한 전교 실적은 성인 세례자 187명, 임종 대세자 415명이라는 숫자를 기록하였다. 1940년에는 제2 보좌신부로 조인환(曺仁煥) 신부를 맞이하고, 1944년에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로부터 2명의 수녀를 파견받아 전교에 더욱 주력하였다.
교구장과 주임신부의 정교분리원칙, 성속이원론적인 신앙 강조에 명동대성당은 일제하 한국인들이 당면하였던 반침략운동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명동대성당의 그러한 결정은 곧 바로 세례자 감소와 신자증가율 의 급격한 감소로 나타났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종교정책이 완화되자 명동대성당은 성당 부속건물 건립에 주력하였다. 1만여 평의 성당 부지에 수많은 건물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1924년에 인가된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의 설립과 많은 관련이 있었다. 종교 건물에는 세재상 상당한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명동대성당은 계성학교의 운영을 통해 교육사업에 참여하였고, 한국인 신자들은 청년회를 중심으로 성당 운영에 참여하는 한편 애긍회를 기반으로 양로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성당으로 일제 식민지 시기 명동대성당은 언제나 일제의 감시와 규제 아래에 있었다. 1910년대의 부분적인 규제, 1920년대의 완화된 정책을 거쳐 1930년대 일제는 종교단체에도 전면적인 통제를 가하였다. 일제의 전시총동원정책이 추진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전시총동원체제로 개편하였다. 거의 모든 성당에서 일제의 강요 사항들이 실현되었는데, 명동대성당에서는 일본군 상급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일제의 전시총동원정책들이 시행되었다. 명동대성당에서 행해지는 종교 행사에 일본군 상급자들이 참석하였다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에 일본군들의 감시와 규제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일제하 한국민족에게 중요한 과제는 반봉건과 반침략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우선주의를 채택하여 일제의 한국침략에 거리를 두었던 성직자들과 성속이원론에 입각하여 민족문제에 소홀하였던 한국인신자들의 태도는 반성이 요구된다. 이 문제는 후고에서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