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현황과 주교좌로서의 명동대성당을 소개합니다.

명동대성당의 역사

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5. 1950년대 한국 사회 변동과 명동대성당




1. 들어가는 말


1950년대는 민족사나 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 민족사적으로는 현대 한국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성격들이 형성되던 시기였으며, 교회사적으로는 한국교회가 사회변동에 대한 체험을 통해 한국사회와의 관계를 유형지면서 급속한 성장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1950년대 한국 사회변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6.25 전쟁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였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사건을 축으로 하여 고찰할 때 1950년대 한국 사회변동과 명동대성당간의 관계는 보다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2. 명동대성당의 6․25 전쟁 체험


명동대성당은 성년(聖年, Holy Year) 경축과 새 본당신부의 부임이라는 두 가지의 변화와 함께 ‘1950년대’를 맞이 하였다.

당시, 한국교회는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발발가능성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광복이후 교회가 나타내는 사회적 영향력의 강화와 신자 증가현상에 만족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본당신부인 장금구 신부는 서울 시내의 본당신부들은 피난하지 말고 서울에 남아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 하라는 교구 참사회의의 결정에 따라 명동대성당에 남아 공산치하를 겪었다.
교회에 대한 공산정권의 탄압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단계는 성직자들에 대한 체포와 연행이었다. 이에 따라 교황사절인 번(Byrne) 주교를 비롯한 다수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명동대성당의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이 납북되었다. 제2단계는 교회시설의 강제점령과 수용이었다. 교구청을 비롯하여 계성학교, 성모병원, 유치원 등 명동대성당 구내나 인근에 소재한 대부분의 교회시설들이 인민군에 점령되어 군사시설로 활용되었다. 제3단계는 교회에 대한 회유와 이용이었다. 인민군사령부에서는 ‘기독교 민주동맹’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성직자들과 명동본당 회장들에게는 노 주교가 이승만과 공모하여 북침을 계획하고 무고한 인민을 학살하였으며 신부들은 신자들을 착취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국가를 멸망의 길로 끌어넣었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자술서를 쓸 것을 강요하였다. 또한 신자들을 총출동시켜 궐기대회를 개최할 것과 성명서를 발표할 것, 라디오 방송에 참여할 것 그리고 이북 종교시찰단에 참여할 것 등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와 이용은 부교구장과 본당신부의 기지로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명동대성당은 상당 기간 동안 본당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적어도 8월 6일까지는 매 주일마다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가정방문과 성사집전을 비롯한 본당신부의 사목활동은 계속되었다.
서울수복작전에 따른 유엔군의 공습으로 인해 당시 명동 일대는 거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주변지역이 초토화되는 상황에서도 명동대성당의 물리적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것은 당시 인민군 공작대 대장으로 행세하던 김충성(베드로)이라는 평신도와 윤을수 신부의 활동 덕분이기도 하였다. 김충성의 정보제공과 노력은 본당신부의 납북을 비롯한 교회의 인적 물리적 손실을 극소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유엔군사령부를 상대로 한 윤을수 신부의 적극적인 로비활동은 명동일대에 대한 유엔군의 집중폭격으로부터 오직 명동대성당만을 제외토록 함으로써 성당 건물을 보존케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이와 같은 도움에도 불구하고 명동대성당 또한 여러 면에서 피해를 받고 있었다.

3. 전후의 사회적 상황과 명동대성당


전쟁 직후, 명동 일대는 월남한 피난민과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인해 몰려든 이농자들 그리고 폭격으로 인해 집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집결지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구제활동은 성당 복구와 함께 명동대성당의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복 직후부터 명동대성당은 미국 민간 구호품의 분배처가 되는 등 민간사회복지활동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당시 명동대성당의 구제 활동은 N.C.W.C.(미국 가톨릭복지위원회, 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의 약칭)의 원조로 전개되었는데, 구호품과 원조 액수는 미국의 그 어떤 민간 구호단체들이 보내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이 구호품들은 행정기관과의 협조 아래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없이 구호대상자들에게 공정하게 배분되었다.
전쟁 체험은 한국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내면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해방공간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보급에 주요 역할을 담당했던 한국교회는 전쟁 초기에는 격렬한 반공 구호들을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동참하였으나, 수복 직후부터는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 대한 미움보다는 전쟁 체험을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승화시키려는 ‘고통의 신정론’(苦痛의 神政論, the theodicy of suffering)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가 지녔던 반공 이데올로기가 감정적 차원을 넘어 신앙적 내지는 신학적 차원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전쟁은 한국 문화 예술의 집합처였던 명동지역의 정서를 크게 변화시켰다. 전후의 명동 거리는 허무와 퇴폐 그리고 문화적 갈등과 혼란으로 가득 찬 ’상실지대‘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동대성당은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화 그리고 구원을 주는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명동대성당의 상징화는 명동대성당의 활발한 구호활동 그리고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활동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명동대성당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의 성소(聖所)로 일반인들에게 각인(刻印)되어 나아갔다. 이러한 인식은 명동지역이 환락과 퇴폐의 장소로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본당의 성장과 발전에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즉 명동대성당이 갖게 된 상징성은 본당의 내적 변화를 촉진시키는 한편, 입교자와 개종자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던 것이다. 우선, 본당 내적으로는 본당 조직의 강화와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활성화를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본당 내의 각종 신심단체와 활동단체의 재건과 활성화는 물론 한국 평신도사도직운동의 주류를 이루어온 가톨릭 학생운동과 가톨릭노동청년운동 및 레지오 마리애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도직 운동단체들과 신심단체들은 명동대성당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은 한국 평신도운동의 본산으로 그 역할을 강화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징성의 강화와 평신도사도직운동의 활성화는 신자 수효의 증대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전쟁 이전과는 달리, 이 시기부터는 지성인들과 중류층 이상의 입교자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교회의 계층구조에서 중류층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4. 이승만 정권과 명동대성당


전쟁 이전, 이승만(李承晩)과 친화적 관계를 유지해오던 명동대성당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갈등관계로 급전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의 도덕성 결여와 독재화 때문이었다. 특히 전쟁 직후 발생한 보도연맹 사건(1950년)과 국민방위군 사건(1951년) 그리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1952년),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경찰조직과 관료조직을 총동원하여 권위주의체제를 강화하고 정권의 장기화를 획책하는 이승만의 통치 방식은 그에 대한 교회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철회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에서는 정치적 사건들의 배경을 파헤쳐 그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저항은 이승만의 독재화가 가속화될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와 같은 교회의 반독재투쟁은 교회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연결되었다. 이승만은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주교를 여러 차례 불러 질책하였으며, 그를 ‘정치주교’ 또는 ‘야당주교’라 하여 법무부장관을 교황청에 보내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과 서울교구장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가톨릭신자들의 관직 임명을 거부하고 신자공무원들을 먼 곳으로 좌천시키거나 파면하는 등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켜 나갔다. 이와 같은 교회와 정권간의 갈등은 교황청 포교성성장관인 아가지아니안(Petro Agagianian) 추기경이 한국을 방문하여 「경향신문」의 운영을 포기할 것을 권고하는 사태로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노기남 주교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교회의 비판과 저항은 종교와 정치를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 권리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라는 이유로 추기경의 권유를 거부하였으며 결국 「경향신문」은 폐간 처분되었다.
당시, 노기남 주교는 이승만정권의 도덕성 문제에 저항하고 평신도들의 정계 투신을 권장하면서도 성직자들의 정계 투신은 만류함으로써 정치 참여에 일정한 한계를 유지코자 하였다. 따라서 당시 교회와 정치권력간의 갈등은 교회가 정교분리의 정신을 훼손하거나 정치를 이용코자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예언자적 사명의 수행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훨씬 이전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교회의 입장이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반독재투쟁은 신학적 기반에 토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교회가 추천한 장면과 이승만간의 대립도 상당히 작용했다는 점에서는 한계성을 갖기도 하였다.

5. 맺는 말


명동대성당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교회라는 역사적 성격과, 수도 서울을 관할하는 서울교구의 주교좌본당이라는 교계적 성격, 그리고 서울의 중심지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성격을 함께 갖고 있다.

1950년대라는 격동의 시대에 명동대성당이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와 같은 여러 성격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50년대의 명동대성당은 민족이 겼는 수난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한편, 그러한 수난과 고통을 해방과 구원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응분의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명동대성당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한편, 명동대성당은 물론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촉진시킨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통을 통한 부활 체험이라는 그리스도적 신비와도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이후에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위상과 발전은 한국의 사회변동이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동대성당이 역사 전개의 한복판에 서서 민족이 겪는 수난과 고통에 적극 동참하고 그러한 수난과 고통으로부터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 투신한 결과였다. 이것은 민족사에 대한 동참이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점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회사목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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