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주보성인무염시태 마리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공로를 미리 입게 하시어 성모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고 찬미하는 날이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 번 잘 살도록 준비시키는 대림절의 핵심적인 신심이다. 교회는 5세기말부터 예루살렘의 마리아 성당 봉헌일인 9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을 지냈다.
8세기경부터는 이날에서 거슬러 계산하여 9개월 전인 12월 8일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로 지냈으며, 이것이 9세기경 서방 교회에 전파되었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를 로마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한국 교회는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청원에 따라, 1841년 8월 22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본래 수호 성인이시던 성 요셉과 ' 성모 무염 시잉 모태'(聖母無染始孕母胎,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조선 교회(한국 교회)의 공동 주보성인(Compatroni)으로 정한 이후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명동대성당을 축성하면서 마리아께 봉헌하므로 명동대성당의 주보 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상징이며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교회당 건물로서, 당시의 교구장 블랑(Blanc) 주교가 1883년 무렵 종현(鍾峴) 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종현 일대의 이 터는 원래 이조판서를 지낸 윤정현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바깥채만 60여 칸 되는 대형 가옥과 함께 김범우(토마스) 명의의 명례방 터를 구입하여 블랑 주교가 그대로 이용, 우선 신학생 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을 설립ㆍ운영하였으며, 이후 풍수지리설과 관련해 조선 정부와 토지 분쟁이 있었으나 1890년 이를 마무리지었다.
- 1892년(고종29년) 8월 5일 블랑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Mutel) 주교가 정초식을 가지면서 한국 교회를 위해 일했던 주교와 선교사, 은인들의 명단을 머릿돌 밑에 묻고 머릿돌을 축성 기초하였으며, 성당의 설계와 공사 감독은 코스트(Eugene Coste) 신부가 맡아 진행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코스트 신부가 선종함에 따라 프와넬(Poisnel) 박 신부가 업무를 이어받아 성당 건축을 완공하였으며, 그리고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당 축성식을 갖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바로 종현성당(鐘峴聖堂)으로 한국 최초의 본당(本堂)이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첫 고딕 양식 건축물(사적 제258호)로 기록된 성당이다.
- 성당 건축 과정에서 많은 신자가 무료로 노력 봉사하였으며 성당 건축에 쓰인 벽돌은 중국 청나라의 벽돌공을 데려다가 만들었는데, 위에서는 라틴 십자가형 삼랑식(三廊式)의 장중한 고딕형이며, 내부는 왼쪽에 1952년 설치한 79위(位) 복자 제대(祭臺) 및 복자 상본(像本)과 김대건 신부님상이 있으며, 오른쪽엔 세례를 위한 세두대(洗頭臺) 대리석과 건축가의 주보성인 성 베네딕토상이 있다. 교구장석 강론대(講論臺)는 프와넬 박 신부의 고향에 있는 성당의 강론대를 모방한 것이라 한다. 후에 뒷면 성가대석에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었다.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하여 성당 명칭은 종현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뀌었고 현재 서울대교구주교좌명동대성당이라 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