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현황과 주교좌로서의 명동대성당을 소개합니다.

명동대성당의 역사

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8. 1980년대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




1. 머리말


1980년대의 ‘명동대성당’을 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는 것과 같이 회고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민주화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던 그 시절의 공감대를 확인하는 작업은 앞으로의 새로운 지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우리는 1980년대의 우리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명동대성당의 위상과 역할을 조명하고자 한다.
1980년대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은 1970년대에서와 같이 명동대성당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측면도 없지 않으나, 그보다는 명동대성당의 외부, 즉 한국사회의 여러 영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강요된 측면이 많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명동대성당이 그런 정치적 요구를 받게 되는가? 우리는 그것을 제한적 다원주의 사회( society in limited pluralism)의 구조적 요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왜 명동대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는가? 그것은 명동대성당이 제한적 다원주의 사회속에서 ‘대안적 헤게모니 기구’로서의 조건을 다른 종교집단보다 월등하게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교회와 사회간의 관계, 그리고 교회내부의 사정을 개괄해보면 다음과 같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응방식을 놓고 분화되기 시작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입장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산하지 못하고 답습된 권위주의 군부독재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복잡하게 분화되어갔는데, 이러한 복잡성은 우선적으로 1980년대가 겪었던 정치변동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된다. 먼저 1987년 6월 '시민항쟁' 이전의 시기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교회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보여줄 내부분열의 상징적 징표는 1979년 10․26 직전에 ‘가톨릭시보’에 발표된 ‘교회현실을 우려하는 연장사제들’이 쓴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분규는 10․26, 12․12,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이면으로 숨겨졌고, 1982년에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최기식 신부의 구속으로 교회는 1970년대의 ‘호민관적’(체제비판적) 역할로 복귀하는 듯했다.
그러나 1980년대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정치체제에 대한 폭발적 요구를 교회에 대행시키기에는 너무도 격동적인 시기였다. ‘1980년 광주’를 체험한 세대들은 1970년대식의 ‘피신처로서의 교회’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독자적인 운동조직들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정치적 역할은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였다. 여기에 더하여 1987년 6월 이후에는 형식적인 민주화의 진전과 국가에 의한 유연한 통치방식의 구사로 인해, 교회의 정치참여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다. 또한 정부의 교회에 대한 대응방식도 1970년대의 강압적 자세로부터 유화적 자세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편 교회 내부적으로는 한국 천주교 공동체의 사회적 구성이 매우 이질화되었다. 즉 1970년대 이후 급격한 신자의 증가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교회의 정치적 보수화를 촉진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로 1970년대 이후에 입교한 신자들의 사회계급적 위치를 통해서 확인되는 교회의 ‘중산층화’ 현상이고, 둘째로 신자증가로 인한 교회조직의 대형화와 관료화, 조직관리부담의 증가로 인한 종교적 관심의 교회 내부화 경향이다.

2. 명동대성당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


1) 광주항쟁,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최기식 신부의 석방운동

1980년대 초․중반은 한국 천주교의 정치적 발언이 비교적 적었던 시기였고, 따라서 명동대성당도 정치적 참여보다는 종교적 차원의 활동에 더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는 역시 광주항쟁이었고, 이와 연관된 사건으로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최기식 신부의 구속이었다.
1980년 5월 23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신자들에게 광주항쟁에 대해 특별기도를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한 이래, 6월 25일에는 김추기경이 시국관련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광주항쟁에 대한 해결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하였으며, 명동대성당에서는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기원하는 철야기도회가 열렸다.
광주항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기 위해 1982년 3월 18일 발생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피의자들이 원주교구에 피신을 요청하고 최기식 신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자 김수환 추기경은 1982년 4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성유축성미사 중 강론을 통해, “최 신부의 행동은 가톨릭 사제로서 정당하고 합당한 행동”이라고 인정하였다.
또한 4월 26일 저녁 7시 명동대성당에서는 ‘최기식 신부와 구속자들을 위한 특별미사’가 한국 정의평화위원회 주관으로 봉헌되었다. 이날 강론을 맡은 윤공희 대주교는 “최기식 신부가 겪고 있는 고통은 최 신부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 교회와 사회 전체의 고통이며 더 나아가 이 시대를 대변하는 아픔이자 표징”이라며 “우리 모든 신자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폭력은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교회정신을 깊히 깨닫고 최신부와 모든 관련자들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2) 본당 사목회 산하 ‘사회정의위원회’의 신설

1980년대 중반기 명동대성당 내의 평신도들의 움직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1985년 3월 3일 사목회 내에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보다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자 ‘사회정의위원회’를 신설한 것이다. 이 위원회의 구체적 활동계획으로서는, 첫째, 항시 다른 위원회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사회정의의 고취를 위한 교육, 피정, 좌담회 등의 행사를 추진토록 기획하고, 둘째, 매년 12월 인권주간 중에 특전미사를 봉헌하여 인권옹호와 사회정의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행사계획하며, 끝으로, 가난한 형제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법률구조 사업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3) 신앙선배들에 대한 재조명 : 안중근 의사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추모미사

1986년 3월 26일 저녁 명동대성당에서는 안중근(토마) 의사의 순국 76주기를 추모하는 미사가 거행되었다. 이 날의 안의사 순국 76주기 추모미사는 8190년에 이어 6년만에 이루어진 교회의 공식 행사라는 점에서, 또한 그후 매년 지속적으로 기념미사를 봉헌할 것을 다짐하는 자리가 됐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명동대성당의 신앙선배에 대한 재조명 노력은 같은 해 4월 7일 저녁,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 정약용(요한) 선생 서거 150주년을 맞아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추모미사로 이어졌다.

4) 「빈들판」의 지식인들의 외침

명동대성당이 새로운 세계관을 지지하고 그것의 개연성을 보장해주는 참여자들 사이의 의사소통구조( plausibility structure)로서, 1980년대 중반에 갖추었던 것이 서울주보의 명동대성당 주보난에 게재되던 「빈들판」이었다. 이 난은 1985년 10월 당시 명동대성당의 주임신부였던 김수창 신부의 권유로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의 몇몇 임원들(김태봉, 양승규, 구중서, 허종열, 안병영, 김어상, 노길명, 조규철, 조광, 김기혁, 류근일)과 명동대성당 신부들이 번갈아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1988년 1월까지 계속되다가 중단되었고 다시 1991년 4월부터 게재되었다. 이 난은 시대의 징표에 따라 양심의 소리를 외치기도 하고, 일상의 삶에서 느낀 생각을 간추리기도 함으로써, 훗날 “시대를 증언하고 정의를 위해 예언직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발휘되었던 마당”이라는 평가를 듣었다.

5) 명동대성당 청년연합회의 새로운 가톨릭문화 창달을 위한 활동

1970년대부터 '명동대성당 청년연합회‘의 활발한 정치적 참여활동은 명동대성당 성직자들과 마찰을 빚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들의 활동 중에서 1980년대적 특수성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가톨릭문화의 창달을 통한 정치참여로의 승화라는 차원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1981년 6월 '공동체놀이연구회'의 전신인 ‘레크레이션 개발부’가 창립되었는데, 이들은 “이 땅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풍물과 탈춤, 민요 등을 기본으로 우리 정서에 맞는 놀이를 개발, 보급하여 개인주의화되어가는 현실사회에 공동체감을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들은 1986년 봉산탈춤을 연습하기 시작하여 매년 자체연수를 거듭하였고, 이를 교구 내 다른 성당과 직장단체에 전수하기도 하였다. 1983년 4월에 창립된 ‘가톨릭 민속연구회’도 비슷한 지향을 가졌던 단체로서 창립 이후 공연과 활동을 통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청년미술학교의 개최를 통해 ‘민중예술’을 대중화하려는 노력도 보여주었다.
한편 1984년 4월 가톨릭청년문화연구회 산하의 노래선교단으로 창단된 ‘신새벽’은 대중음악을 통해 청년들의 공감대 형성에 크게 기여했는데, 매년 정기발표회 공연, 노래 테이프 제작, 노래책 발간, 개사곡 보급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었다. 이들의 ‘노래운동론’은 문화에 대한 1980년대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들의 실험적 예술활동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엇갈릴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가톨릭문화를 풍부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6) 1987년 6월의 ‘명동대성당 농성’

명동대성당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까지는 종로5가의 기독교회관과 함께, ‘민주화를 향한 절규’를 토해내는 종루(鐘樓)의 역할을 나누어서 맡아 왔었다. 그러나 1987년 5월 18일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미사‘가 끝난 후,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이발표되면서, 그리고 그해 4월 상계동 철거민들의 집단 천막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리고 6.10 시민항쟁 도중 학생․시민시위대의 ’해방구‘ 역할을 하게 되면서, 명동대성당은 어느덧 ’명동천주교회‘의 자리로부터 한국사회 각계각층의 온갖 부조리를 규탄하고 온갖 권리를 청원하는 ‘아고라’(광장)로 변신하고 말았다. 이후 명동대성당은 ‘과잉 정치화’라는 문제를 가지고 교회 안팎으로부터의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이후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명동대성당의 ’호민관적 역할‘(tribunary role)의 전형적 사례는 1987년 6․10 시민항쟁 도중 학생․시민시위대의 ‘명동농성(6. 10-15)’이었고, 그 이후 전개되는 시위들은 정부당국과 교회, 그리고 시위주체들 삼자관계에서의 변주곡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6월 명동농성에서는 체제의 정당성이 ‘6․10 항쟁’이란 극단적 위기 국면에 의해 위협받는 정치권력과, 이에 대항하다 우발적으로 명동대성당에 피신하는 과정에서 학생, 노동자, 도시빈민, 일반시민 등 ‘범국민적’으로 구성된 시위대(그리고 이들을 명동대성당 외부에서 지원하는 시민운동세력),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과 수녀단, 명동대성당의 평신도들로 구성된 가톨릭교회의 삼자간의 관계로 압축된다. 이 삼자관계 속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대표되는 가톨릭교회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던 정치권력으로부터 시위대의 안전귀가와 사후문책의 포기라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정치적 ‘해결사’의 능력을 보여주게 되었고, 이런 정치적 카리스마(charisma:권능)는 그후 가톨릭교회, 특히 명동대성당의 정치적 카리스마에 대한 과신으로 이어지면서 ‘명동의 신화’를 낳게 되었다.

7) 1987년 6월 이후 명동대성당의 ‘아고라’화

명동대성당이 정치시위의 독무대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6․10 시민항쟁 도중 학생․시민시위대의 ‘명동농성’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6월부터 1989년 12월까지 2년 반 동안 130여 회의 크고 작은 시위가 숨쉴 틈없이 이어졌고, 그 중에서 13회는 철야시위였는데, 짧게는 하루 이틀밤에서부터 길게는 몇 달을 끌었던 농성(상계동 철거민 농성)까지 있었다. 시위 농성의 주제별로 살펴보면, 정치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반독재운동)가 71회(55%), 경제정의를 요구하는 시위가 34회(26%), 장애자 권익추진대회 같은 사회복지문제로 인한 시위가 17회(13%), 그리고 통일문제로 인한 시위가 7회(5%)를 차지했다.
시위의 주제가 1987년과 1988년에는 정치적 차원에 집중되었던 반면에 1989년에는 경제정의 및 사회복지에 대한 구체적 요구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동기에서 비롯된 시위가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경우들도 여러번 있었다.

8) 통일운동

1970년대의 인권과 민주화의 요구는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통일로 변화되는데, 그것은 인권과 민주화의 제약은 분단체제로부터 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정치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분단체제의 극복, 즉 통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회과학적 인식이 운동권, 그리고 천주교회 진보적 분파의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명동대성당의 통일운동은 1985년부터 북한선교부의 ‘통일을 위한 미사’ 봉헌을 통해 가시화되었지만, 이러한 종교적 차원의 노력에 만족하지 못한 청년신도 조성만의 투신자살과 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 파북사건으로 인해 통일논의는 급격하게 정치적 쟁점화하였고, 이는 교회 내에 또다른 분규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9) 명동대성당의 ‘아고라’화에 대한 교회 내부의 갈등

명동대성당이 온갖 정치적 이슈의 성토장이 되면서 교회의 정치적 입장표명에 대해 제동을 가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나타났던 징후로는 1987년 5월경 주교회의 결정사항으로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가톨릭농민회, 가톨릭 대학생연합을 비인준단체로 공표한 사실이다.
이런 징후가 명동대성당의 차원에서 사실로 나타난 것은 1987년 11월 명동대성당청년연합회의 활동이 본당 내 사제들에 의해 정지된 것이었다. 그후 ‘명청연’의 활동은 1988년 2월에 가서야 재개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가장 선명한 논지를 유지하며 ‘예언자적 발언’을 하였던 「빈들판」의 내용이 1988년 1월 31일부터는 본당사목의 분야별 소개와 제언을 싣기로 변경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1991년 4월까지 사라졌던 것,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양의 판문점 귀환시 문규현 신부의 행동주의를 못마땅해하는 명동대성당의 평신도들이 그의 사제직 박탈을 획책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1987년 10월 13일 저녁 민정당 내 천주교신자모임인 미리내회 회원 500여 명이 ‘나라를 위한 미사’를 가졌는데,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대학생들이 성당구내에 들어와 “성전은 독재정권의 표밭이 아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연좌농성을 벌이다가,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미리내회 회원들과 충돌, 이들에게 달걀을 던지고 모래 등을 뿌리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3. 맺음말


명동대성당은 1980년대를 통해서 ‘대안적 헤게모니 기구’, 또는 한국사회의 ‘호민관’이라는 사회적 위상으로 존재했었다.

그러한 사회적 위상이 가능했던 것은 명동대성당이 누릴 수 있었던 종교집단의 조직적 자율성이었다. 다음으로 명동대성당은 도시지리적 중심성만이 아니라, 그 교회적 구성의 특수성으로 인해 거의 전 수도권에서 ‘속지주의’에 묶이기를 거부하는 자유분방한 지식인들을 평신도 지도자들로서 동원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끝으로, 비판적 시각을 지지하고 그것의 개연성을 보장해주는 참여자들 사이의 의사소통구조( plausibility structure)로서 명동대성당은 「서울주보」라는 매체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학적 조건에 의해 확보된 명동대성당의 위상을 가지고 명동대성당은 1980년대 초반에는 광주항쟁 당시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기원하는 철야기도회의 장소였으며, 광주항쟁이 끝난 후에는 광주의 형제들을 위한 헌혈의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었을 때는 가톨릭의 주요 성직자와 평신도가 한데 모여 정부의 부당한 조치를 항의하는 규탄의 장소이기도 했다.
1980년대의 명동대성당은 한국교회사 속에서 왜곡되어왔던 복음과 역사의 관계를 광정(匡正)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니, 신앙의 선배였으면서도 합당한 가치평가와 존경을 받지 못했던 안중근의사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신앙을 재조명하는 미사를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로써 명동대성당은 민족사 속에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명동대성당은 민주시민들의 공론의 장인 ‘아고라’(agora)를 갖지 못했던 1980년대 한국사회 속에서 ’아고라‘의 역할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화와 정의가 외쳐지는 성당밖의 ’명동대성당‘에 비해서 가톨릭공동체로서의 성당안의 ’명동대성당‘은 얼마나 민주적이고 정의로왔었나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명동대성당을 ‘명동대성당’이게 하였던 근원적 요소는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조직력이 평신도들에게,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회 제세력과의 대화를 향해 (제한적으로나마) 열려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를 향한 명동대성당의 비젼은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의 다양하면서도 창발적인 참여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0년대 ‘광장의 이념’이 사라지고 ‘밀실의 문화’가 자리잡는가 싶더니 예기치 못했던 IMF의 위기가 다시 우리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는 세기말이다. 명동대성당은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1980년대의 경험에서 귀중한 경험을 도출해야 한다. 이제 명동대성당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필요는 없어지고 있다. 이제 명동대성당은 보다 근본적 차원의 ‘정신적 아고라’, ‘문화적 아고라’ 그리고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진정으로 복음화하는 ‘영성(spirituality)의 광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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