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현황과 주교좌로서의 명동대성당을 소개합니다.

명동대성당의 역사

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6. 1960년대 명동대성당의 존재 이유




1. 머리말


1960년대는 한국사회와 한국 천주교회 모두가 급격한 변화를 체험했던 시대였다.

즉, 당시 한국사회는 4․19 학생혁명과 민주당 정권의 등장과 5․16군사 쿠데타 및 민정이양이라는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또한 민주당 정권에서 입안했고, 군사정부에서 추진해 나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한국사회는 급속히 산업화되어 갔다. 그리고 세계교회사적 차원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교회의 쇄신이 도처에서 강력히 주창되던 때였다.
이와 같은 변동의 당연한 결과로 당시의 교회사나 교구사를 파악 위해서는 당시의 교회가 직면했던 내외적 조건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물론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본당이었던 명동대성당도 국내외의 시대적 조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당시의 명동대성당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당시 한국사회와 교회 그리고 세계교회의 동향에 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즉, 명동대성당이 당시의 시대적 조건과 요청에 어떻게 반응하고 응답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명동대성당의 존재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교회의 존재이유는 ‘인류의 구원’ 내지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의 최종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완성만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아니하고, 그 완성을 향해 가는 도정(道程)도 중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교회는 자신의 궁극적 지향과 관련되는 범위 안에서 현실의 질서와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즉 교회는 현실의 사회질서와 역사 안에서 긍정적 기능을 담당할 때 그 자신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확인하고 외부로부터도 확인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60년대 당시의 명동대성당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어디에 설정하고 있었으며, 또 한국사회에서는 이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원래 교구의 주교좌 성당은 교구장 주교가 상주하며 관할권을 행사하는 본당을 뜻한다. 그러므로 주교좌 성당의 역사는 교구사와 밀접히 연결되는 것이며, 주교좌 본당사의 주요 부분으로 교구의 동향 내지는 주교의 활동을 포함해야 한다. 명동대성당은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본당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1960년대 명동대성당의 존재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와 명동대성당에서 전개된 교회사적 사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요청된다. 뿐만 아니라 명동대성당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상징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1960년대 명동대성당사의 이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사의 동향까지도 참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서 1960년대 명동대성당의 존재이유를 좀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해의 배경


명동대성당은 한국사회나 한국교회 내지는 세계교회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

이 교회 안팎의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대응은 곧 명동대성당사의 주요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특히 명동대성당은 주교좌 본당이다. 여기에서 명동본당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구장 주교의 동향 내지는 교구의 일반적 동향도 참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1960년대 명당성당사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특성의 배경 내지는 원인으로 작용했던 여러 사건들을 검토해야 한다.
우선 1960년대 당시 세계사적 조건은 동서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그 일환으로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파병되어 그 전쟁의 여파가 국내에도 직접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국내의 정세로는 4․19 학생혁명으로 인해서 자유당의 집권이 종료되었고, 민주당 정권이 등장했다. 장면을 수반으로 하는 민주당 정권의 등장은 교회가 한국 민족과 사회에 대해서 직접적인 참여의 기회를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전복되었고, 권위주의적 정권이 등장했다. 그들은 민주당 정권이 마련했던 경제개발계획을 실천했다. 이 이후 한국사회는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교회는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문제들에 대해서도 점차 관심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 교회 안에서는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교회는 교황 요한 23세의 제창에 따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0.-1965.12)가 개최되고 있었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세계교회는 변해갔다. 한국교회는 1962년 3월 10일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시행되었다. 교계제도의 시행과 함께 서울은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서울대교구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주교들은 공의회의 교부로 활동했다.
한국교회도 공의회의 여파로 인해서 자기 쇄신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공의회의 여파는 신도들의 전례생활과 교회 내에서의 활동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개신교를 비롯한 타종교와의 관계와 사회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신앙의 토착화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 당시 신도들이 체험한 변화의 한 사례는 미사의 양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교회에서는 미사 중에 매괴신공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0월 매괴성월이면 신자들은 주일에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동안 내내 매괴신공을 바치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1960년에 이르러서야 잘못된 것임이 비로소 지적되었다. 또한 196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제대의 위치가 변하면서 영세체하는 양식도 변화가 모색되었다. 전례쇄신의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전통이 다시금 중시되었고, 이 전통에 따라서 성체를 손으로 받아서 영하는 새로운 형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9년 7월에 한국교회에서는 이 새로운 형식에 대한 중지령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도 있었다. 이렇듯 당시의 교회에서는 개혁으로 인한 혼란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한국어 미사경본을 갖게 되었고(1965.1.1.), 한국어로 봉행되는 미사를 준비했다.

3. 명동대성당의 역할


1960년대 서울의 주교좌 성당이었던 명동대성당을 알기 위해서는 교구장과 역대 본당신부들의 면모를 우선 검토해 보아야 한다.

1960년 당시 서울감목대리구의 감목으로는 노기남 주교가 있었다. 노기남 주교는 한국에 교계제도가 시행된 1962년 대주교로 승격했다. 노기남 대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한 후 윤공희 주교가 교구장 서리에 취임했다(1967.3.24). 그후 1968년 김수환 대주교가 교구장에 취임했고,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1969.3.28.). 한편, 1960년대 명동대성당에는 양기섭 신부, 이종순 신부, 신인식 신부, 황민성 신부, 이계중 신부, 이문근 신부 등이 본당신부로 봉사하고 있었다.
1960년 당시 명동대성당은 한국천주교회 내지는 서울교구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은 한국에서 전개된 각종의 정치 경제적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초기 명동대성당이 체험했던 시대적 격랑은 4․19 학생혁명과 민주당 정권의 등장 그리고 5․16 쿠테타와 관련되어 있다. 우선 서울교구 내지 명동대성당에서는 4․19 학생혁명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자세를 드러내었다. 학생혁명에 대한 지지는 자유당 정권 하에서 진행된 교회에 대한 직접 간접적 억압과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 부통령에 대한 견제에 대해서 교회가 반발했던 사실에서 그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도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명동대성당에서는 학생혁명이 진행되던 도중 모금운동 등으로 이를 지원했다. 학생혁명의 희생자인 노두희(시몬, 동국대생)의 장례미사가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열렸다.
학생혁명의 결과로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서울대교구와 명동대성당은 일정한 기능을 발휘했다. 그리고 1960년도의 7․29총선거에 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구했다. 이 선거의 결과 제2공화국이 탄생했고, 장면 요한이 초대 국무총리로 당선되었다. 당시 노기남 주교는 “교우들은 일치 단결하여 장 박사의 초대 내각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도록 기구와 희생을 아끼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민주당 정권에 대한 서울교구 내지는 명동대성당 신도들의 지지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5․16 쿠데타에 의해서 단명으로 끝나게 되자 민주당 정권을 적극 지지하던 당시 교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주한교황사절단은 ‘반공을 기치로 삼은 정권’인 군사 쿠데타 당국에 대한 지지를 가장 먼저 표현하게 되었다. 그후 서울교구 내지는 명동대성당에서는 쿠데타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전혀 시도한 바가 없었고, ‘반공’이라는 가치가 정당함을 내세워 쿠데타 세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이후 교회는 군사정권이 주도적으로 시행하던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다. 즉, 1961년 9월 서울교구에서는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 촉진회’를 구성했다. 이 모임에는 명동대성당을 비롯한 서울교구 각 본당의 신부와 회장들이 참여했고, 명동대성당의 양기섭 신부는 그 고문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개최된 주교회의에서도 ‘신앙의 정신으로 국민운동에 적극 협력하라’고 당부했다. 재건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명동대성당에서는 재건국민운동 본부의 농어촌 결연 정책에 따라서 경남 함안군 북면 신창부락과 결연을 맺고 이를 지원하기도 했다. 한편, 군사정권이 등장한 이후 서울교구와 명동대성당은 적지 않은 재정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군사정부 당국의 공작과 교구의 재정난등으로 인해서 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탈취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명동대성당은 내적 성숙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 있었다. 평신도 사도직협의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부터 명동대성당에서는 레지오마리에나 교사회 등의 활동이 있었고, 그밖의 신심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천주교 신용협동조합, 국제가톨릭여자협조회 등의 활동도 명동대성당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고 교회의 쇄신을 위한 노력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명동대성당도 이에 보조를 같이 했다. 그리고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병인순교복자 24위의 시복식을 전후하여(1968), 순교자 신심이 강화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일치 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960년대 후반기에는 개신교 목사가 명동대성당에서 강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변화들은 종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4. 맺음말


1960년대 서울대교구와 명동대성당은 교회 안팎에서 진행된 격심한 변동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 변화의 시기에 명동대성당도 새로운 변화를 잉태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명동대성당은 전례와 신앙생활의 쇄신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공의회의 정신을 새롭게 전수 받기 시작하여 사회를 향해서 열린 교회가 되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명동대성당 내지는 서울대교구는 4․19 혁명이후 비록 단기간에 걸쳐서나마 정치참여의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명동대성당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사회참여에 대한 직접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이 시기 사회개발에 관한 교회의 관심이 증대되어 갔고, 노동이나 인권문제에 대한 교회적 시각이 정비되어 갔다. 그리고 새로운 교구장의 부임과 함께 명동대성당과 서울대교구는 보편적 구원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를 향한 발언을 준비해 갔다. 1960년대 명동대성당은 바로 이와 같이 1970년대 이후 생동하는 교회상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960년대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역사는 특별히 화려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곧 닥아올 1970년대의 활동과 봉사를 위한 착실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1960년대 명동대성당은 새로운 역사를 향한 준비작업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던 데에서 그 존재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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