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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seoul.catholic.or.kr

평양교구90주년기념특집

의사랑평양,안녕!주교방일은

(패트릭번주교의한국이름)

,천국에

서인사올립니다. 벌써평양교구가 90주년이라니감회가새롭

습니다. 제가1923년처음평양땅을밟았을때, 그리고1927년

그곳에처음으로교구장이되었을때저는우리교회의순박하고신실한

사람들이참좋았습니다. 사람이좋으니그곳의동식물도참좋았더랬지

요.그래서제별명은

‘조용한아침의순교자’, ‘한국인패트릭’

이었습니다.

이별명은이곳하늘나라에서도여전히저를부르는수식어가됐습니다.

그만큼제마음은조선땅의우리교회와신자들로가득합니다. 우리평양

교구는참열심한신앙인들이많았던교회였지요. 1927년서울대목구에

서분리되어평양지목구가설정될때, 우리신자들은얼마나기뻐했었나

요. 메리놀외방선교회신부, 수녀들과평신도가함께손잡고기뻐하던것

이엊그제같습니다. 1943년에는우리교구본당이19개나되었고,공소는

106개,학교22개,복지기관은17개나되었지요.평양지역의문화는우리

신자들이선도하고있다해도과언이아니었습니다. 우리신자들은가난

한이웃을먹여살렸고, 꿈에도그리던한글교재를가지고교리공부를했

습니다.참사랑스런신자들이었지요.

1942년태평양전쟁으로인해미국인이었던우리메리놀회원들이모

두조선밖으로쫓겨났을때는우리회원들이평양의착한신자들을얼마

나그리워했는지모릅니다. 한국이해방되고바티칸과수교하게되면서

1947년 8월저는비오 12세교황님에의해초대교

황사절이되어다시한국을찾게되었습니다. 그리

고사랑하는이땅에서주교품을받았지요. 그때의

그감격과기쁨은이루말할수가없습니다. 명동대

성당에서의주교서품식때는하마터면어깨춤을출

뻔했습니다. 그래서저는제주교문장에한국인이

사랑하는 꽃, 무궁화를 새겨넣었습니다. 무궁화는

‘끝없이피는꽃’ 아니던가요. 한민족의상징일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따라야 할 완벽한 전형이 아니

겠습니까.

저는 서울 궁정동 교황대사관에 있었지만, 메

리놀 회원들은 다시 평양 땅으로 갔지요. 그러나

그곳은공산정권이들어서제대로활동할수가없

었습니다.공산정권은종교자유를헌법으로보장

하면서도미신이라하여해방된지 1년안에사찰

하고, 2~3년만에기독교연맹에속한몇몇목사

를제외한모든성직자들의활동을제약하고교회

를 폐쇄시켰지요. 하지만 우리 평양 신자들은 참

위대했습니다. 6대교구장이었던홍용호주교님은일제에의해헐렸던평

양교구주교좌관후리성당터를도로받아와 1946년 8월서울대교구의

명동대성당보다도열두자나더큰성당을지으셨지요.그러나1948년12

월공산당이관후리성당건물을평양인민위원회에양도할것을요구하

며본격적인박해가시작되었습니다.

저는서울에서이모든것을지켜보며우리홍용호주교님의안녕과평

양교구의존속을위해기도했습니다. 바티칸외교관으로서 1948년 12월

12일유엔총회에참석하여, 한국이합법적인독립국가임을인정받도록

도왔습니다. 평양의양떼들, 그리고더나아가이조선땅의착한양떼들

이더욱많은사람들의도움을받아행복하길진심으로바랐습니다.

제바람과는다르게북녘의교회는핍박이본격화되었습니다. 1949년5

월홍용호주교님이피랍되었고, 6·25전쟁직전까지

모든천주교회사제들이체포당하였지요.이때끌려

간신부님들은15명이넘었고, 신학생, 평신도, 어린

복사들의수난도상당했습니다.이것은시작에불과

했어요. 한국 전쟁 기간에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에

내려와서도똑같이교회를탄압하고성직자들을체

포하고학살했습니다. 그유명한 ‘죽음의행진’이시

작되었지요.

이때제가미국의권고를따라미국인들과함께

일본으로 대피하지 않은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닙

니다.교황사절인만큼저는이땅의성직자들과신자들과함께하는것이

당연했습니다. 서울에입성한인민군들이궁정동교황사절관까지들어

와행패를부리고약탈하며못살게굴기에저는명동의주교관으로거처

를옮겼을뿐입니다. 당시에서울대교구장노기남주교님께서로마일정

을소화하던중이었기에,대교구를지켜야한다는생각도컸습니다.

그러다1950년7월11일저는더운날씨때문에테라스에잠시나와있

다가인민군에게발각되었지요. 다른외국인성직자와수도자들과함께

투옥했다가저는인민재판을받아사형을선고받았습니다. 여러날의심

한모욕과심문은아무것도아니었습니다.평양으

로이송된이후만포,고산진,초산진등을거쳐11

월7일중강진부근하창리수용소로이어지는 ‘죽

음의행진’은너무나고통스러웠습니다.그러나저

는신앙을위해목숨을바치는것이늘저의소원

이었습니다.좋으신하느님께서내게이런은총을

주신것입니다. 저는같은달25일, 순교의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나의평양교구.여전히그곳의성당은불을밝히지못하나요.

나는제가지닌사제직의은총다음으로내삶의가장큰은총은여러분모

두와함께하시는그리스도를생각하며수난받는것이었습니다. ‘모든손

님을그리스도처럼맞으라’는우리수도회규칙처럼, 저는제게오는모든

이들을언제나친절하고최선을다해맞았습니다. 성체앞에서한시간의

기도를바치고, 한밤중에도성무일도를이어가고, 매일묵주기도 15단을

봉헌한이유는바로내게온나의주님, 나의평양교구사제와수도자, 평

신도여러분의행복을위한것이었습니다. 조선땅에서의기도는하늘나

라에서도여전히바치고있습니다. 나의사랑스런양떼들을, 서울대교구

의형제자매들께서도잊지말아주세요.

초대 평양지목구장 패트릭 번 주교가 보낸

“하늘에서 온 편지”

1927년 3월은 서울대목구로부터 평양지목구가 분리·설정돼 초대 지목구장으로 패트릭 번 주교

(

Patrick J. Byrne, M.M., 1888-1950,

한국명 방일은)

가 임명된

달이다. 올해로 벌써 9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평양교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만 해도 북녘엔 57개의 성당과

5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있었다. 전쟁 때문에 많은 신자와 수도자,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울러 평양교구장 자리도 공석이 되어 현재까지 서울

대교구장이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다. 가톨릭서울은 평양교구 설정 90주년을 맞아 번 주교의 비서신부였던 부드 신부의 증언록 내용을 바탕으로

초대 평양지목구장 패트릭 번 주교의 가상편지를 구성해보았다. 뜻깊은 날, 하늘에서 번 주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북녘의 형제자매들과 하

늘의 평양교구 순교자들에게 이 편지를 바친다.

정리·편집

서동경 안나·김근영가비노(서울대교구홍보국) |

감수

장긍선예로니모신부(평양교구사무국)

01

이국땅 혹한 속 선교 여정 중 얼어 붙은 압록강에서

썰매를 타는 번 주교(당시 신부)

02

명동대성당에서

03

1953년 번 주교의 순교 후 유품인 묵주가

메리놀 총장에게 전달되고 있다.

04

1949년 추정, 번 주교의 교황 사절관에서의

마지막 사진. 서울 궁정동 교황 사절관 봉사자들과

함께 했다. 오른쪽이 번 주교, 왼쪽이 비서 부드 신부이다.

05

동물을 사랑한 번 주교(당시 신부)

06

1949년 10월 25일 번 주교의 환갑 잔치

07

명동대성당에서 주교 서품 후 퇴장 행렬

(라리보 원 주교와 노기남 주교와 함께, 1949년 6월 14일)

5

내가 지닌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내 삶의

가장 큰 은총은 당신들 모두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생각하며수난받는것입니다.

「비서였던 부드(W. Booth) 신부에게 남긴 말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

원이었지요. 좋으신하느님께서내게이런

은총을주셨어요.

「죽음의 행진 중에 얻은 고초와 질병으로 죽음을 맞게 된

번 주교가 함께 끌려갔던 춘천 지목구장 퀸란(T. Quinlan,

SSC) 몬시뇰(후일 주교로 서품됨)에게 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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