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서명에 함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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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10 00:00 조회8,499회 댓글0건본문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생명의 복음 60)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낙태죄 폐지 반대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직접 청원문을 올렸습니다.
아래 청원에 적극 참여해 주시고 주위에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기존에 하셨던 분들도 다시 한 번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참여방법은 아래 바로가기로 접속하시면 됩니다.
청원마감일은 12월 2일(토)입니다.
(※수기 서명은 2018년 1월 말까지 주일마다 성당마당 부스에서 받습니다!)
청원 참여 바로가기
*참고자료 - <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 >
교황청 신앙교리성성
1. 머리말
(1) 인공유산과 그 법적 자유화의 문제는 거의 모든 곳에서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논쟁은 그처럼 중대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근본적인 가치이며 보호받고 성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이가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인공유산의 보급을 촉진시키기 위해, 심지어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마저도 찾아내려 하고 있다. 사형과 일체의 전쟁을 무조건 반대하는 항의가 증대하면서 한편으로는 협의로든 광의로든 인공유산 자유화를 부르짖는 주장이 동시에 증가하는 사실을 보고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인간품위를 저하시키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인간을 수호할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에 관하여 침묵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셨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그분의 형제이며, 누구나 크리스천이 되어 그분의 구원을 받도록 초대받는 것이다.
(2) 인공유산법의 자유화에 저항하는 많은 국가의 행정당국은 인공유산 자유화를 목표로 하는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다. 말인즉 타인에게 자기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 의견대로 행동한다면 아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윤리의 다원주의는 이념의 다원주의에 저절로 부수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행위는 단순한 의견보다 훨씬 빨리 타인의 권익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타인의 권리, 특히 생명권을 침해하기 위한 의견의 자유를 주장할 수 없다.
(3) 수많은 크리스천 평신도들과 특히 의사들, 뿐만 아니라 부모연합회들과 정치가들 또한 책임 있는 직위의 인사들이 그같은 인공유산 자유화 선전운동에 반대하여 활발히 활동해 왔다. 특히 많은 주교회의와 주교 개개인들은 지금이야말로 교회의 전통적 교리를 명백하게 상기시키기에 적정한 때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헌들은 한결같이 생명존중의 태도를 훌륭히 밝혀주고 있다. 생명존중은 인간적이며 동시에 크리스천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헌들 중의 일부는 이곳 저곳에서 보류 또는 반대를 받기까지 했다.
(4) 전 세계교회의 신앙과 윤리를 증진, 수호해야 할 책임을 진 신앙교리성성은 모든 신자들에게 이 가르침을 그 본질적 각도에서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동 성성은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고, 주교들이 적절하게 수행해온 바를 성성의 고유한 권위로써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견을 다른 의견과 대립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빛으로 윤리규범을 가르치는 ´최고 교도권´의 한결같은 가르침을 모든 신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다. 아직 논쟁이 완결되지 않은 문제나 새로운 의견을 가진 신자들도 이점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이 선언문은 크리스천 양심에 중대한 의무를 명백히 부과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진리를 따라 살고자"(요한 3, 21)노력하는 모든 이들도 하느님께서 비추어주시기를 빈다.
2. 신앙의 빛으로
(5) "하느님은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산 사람들의 멸망을 즐거워하지 않으신다"(지혜서 1,13). 물론 하느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 생명체를 창조하셨고, 육체를 가진 생명체들의 세계에는 물리적 죽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직접으로 하신 것은 생명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만물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창세 1,26-28 참조). 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세상에 죽음을 들여온 것은 악마의 시기였다"(지혜서 2,24).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죽음은 죄에 직결되어 있다. 즉 죽음은 죄의 표지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죽음에는 최후의 승리가 없다. 그리스도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시면서,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다"(마태 22,32)라고 복음에서 선언하신다. 그리고 죽음도 죄처럼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결정적으로 패배할 것이다(Ⅰ고린 15,20-22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생명은 이 세상에서도 고귀한 것인 줄을 알고 있다. 창조주에 의해 주입된 생명은 그분에 의해 다시 거두어진다(창세 2,7; 지혜서 15,11 참조).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창세 9,5-6) 인간의 피가 그분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그 이유를 물으실 것이다(창세 4,10 참조). 하느님의 계명은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출애 20,13)하셨다. 생명은 선물인 동시에 책임이다. 그것은 하나의 ´탈렌트´(마태 25,14-30)로서 받은 것이며 올바로 사용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생명의 결실을 위해 이 세상에서 많은 과업이 부과되는데, 인간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일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생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6) 교회의 전통은, 인간 생명은 모든 성장과정에서와 똑같이 출발에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한다고 언제나 주장해 왔다. 초대 교회는 희랍-로마 세계의 윤리관에 맞서, 그들의 윤리와 크리스천 윤리 간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디다케](Didache)에는, "인공유산으로 태아를 죽이지 말며, 이미 탄생한 아기도 살해하지 말라"고 명백히 서술되어 있다. 인공유산을 위해 약을 사용하는 여자들을 크리스천들은 살인자로 간주한다고 아테나고라스는 강조한다. 모태 속에 아직 살아있는 태아 및 어린이를 죽인 자들을 그는 단죄한다. "그들은 이미 모태에서, 하느님의 섭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떼르뚤리아노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 근본적 원칙은 명백히 재확인하였다 : "출생을 막는 것은 살인을 앞당기는 것이다. 생명의 파괴는 출생 전이거나 후이거나 별로 차이가 없다. 하나의 사람이 될 태아는 이미 그 사람인 것이다."
(7) 역사의 경과를 따라, 교회의 교부들, 사목자, 학자들은 똑같은 교리를 가르쳐왔다. 영혼의 주입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으나, 인공유산이 불의라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가질 수 없었다. 사실 일반적으로 몇 주일이 지나기까지는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던 중세기에는, 죄에 대한 판단과 형벌의 경중에 차이가 있었다. 훌륭한 저자들도 이 첫 기간에 행해진 인공유산에 대해서는 좀 더 관대하게 사례를 해결했으나 그 다음 기간에는 그런 관대한 처리를 하지 않았다. 관대하게 처리해 주었던 첫 기간에 행해진 인공유산도 객관적으로 중죄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단죄에 대해서는 모두 완전히 일치하였다. 많은 문헌들 가운데서 쉽게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847년 마인쯔의 첫 지방공의회는 그 이전의 공의회들이 설정해 놓은 인공유산에 대한 벌들을 재확인했다. 이 공의회는 "태아를 제거한 여자에게" 가장 엄한 벌을 내리기로 결의했다. 그라시아노 교령은 교황 스테파노 5세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고한다. "태아를 인공유산으로 사망시킨 자는 살인자이다." 교회박사 성 토마스는 인공유산은 자연법에 어긋나는 중죄라고 가르쳤다. 르네상스 시대 때 교황 식스또 5세는 인공유산을 가장 엄격히 단죄했다. 그 후 1세기가 지나서, 인노센트 11세는 일부 이완된 교회법 학자들의 제안을 기각했다. 그들은 간혹 아직 영혼이 주입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어느 시기에 행해진 인공유산을 변호하려 했던 것이다. 현대에는 최근에 로마 교황들이 똑같은 교리를 매우하게 반포해 왔다. 비오 11세는 가장 신랄한 반대에 명백한 해답을 준 바 있다. 비오 12세는 직접적인 일체의 인공유산을 명백히 배격했다. 즉 목적으로서든 방법으로서든 일체의 인공유산을 금했다. 요한 23세는 "출발에서부터 하느님의 행위를 요구하는" 생명의 성성(聖性)에 관하여 교부들의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최근에는 바오로 6세가 주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인공유산을 가장 준열하게 비난했다 :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 인공유산의 유아살해는 저주할 죄악이다." 바오로 6세는 많은 기회에 같은 주제에 관하여 말했고, 또한 교회의 이 가르침이 "변치 않았으며,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해 왔다.
3. 이성의 빛으로 본 고찰
(8) 인간 생명의 존중은 크리스천적 의무만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도 인간 본성에 의거하여 그것을 요구한다. 이성적 본성으로 구상된 인간은 인격적 주체로서, 자신을 반성하고, 자기 행동과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지배자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지배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과업이다. 하느님이 직접 창조하신 인간의 영혼은 영신적이며 따라서 불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알려져 있으며 하느님 안에서만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공동체에서 살고, 불가결의 사회구조 내에서 인격적 상호 소통에 의해 성장한다. 각 사람은 사회와 타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생명과 기타 물건들을 소유할 권리를 누린다. 각 사람에 관하여 이 모든 것을 정의가 엄격히 요구한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현세 생명은 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사람은 더욱 심원하고 불멸한 생명의 차원을 갖고 있다. 육체적 생명은 하나의 기본적 선(善)이며, 현세의 다른 모든 선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보다 높은 가치들이 있다. 이 가치들을 위해서라면 육체적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정당할 뿐 아니라 필요할 수도 있다. 공동선은 인간 사회에서 각 사람이 마땅히 기여해야 할 하나의 목적이며, 각 개인의 권익은 이 목적에 종속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최종 목적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완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결정적으로 종속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보다 높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단순한 수단으로서 취급될 수는 없다.
(10) 각 사람과 사회의 상호 권리와 의무에 관해, 양심을 교화시키는 일은 윤리에 속하고, 외적 행위를 규정하고, 체계화하는 것은 법에 속한다. 그러나 사회가 줄 수 없는 상당수의 권리가 분명히 있다. 왜냐하면 이 권리들은 사회보다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로서는 이 권리들을 보호하고 강화할 임무를 띠고 있다. 이 권리들의 대부분이 오늘날 ´인권´이라 불리고 있으며, 우리 세대는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11) 인간의 첫째 권리는 생명의 권리이다. 인간은 기타의 귀한 것들도 갖고 있고, 그 중에는 더 귀중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생명은 근본적인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의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생명은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이 권리를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부인하는 일은 사회나 여하한 형태의 행정당국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인종, 성, 피부색 또는 종교에 의한 그런 차별은 죄악이다. 생명의 권리는 타인의 인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선행하는 것이다. 이 생명권은 타인의 인정을 요구하며 이 권리를 거부한다면 엄밀한 불의가 된다.
(12) 생명의 여러 단계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다른 차별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당화시킬 수 없다. 생명권은 몹시 허약한 노인도 완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불치병 환자도 생명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 이 생명권은 방금 태어난 유아에게도 성인 못지 않게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 실제로 인간 생명의 존중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요구되는 것이다.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면 결코 그것이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3) 영혼이 언제 부여되느냐에 대한 논쟁과는 전혀 별도로, 현대 유전학은 이 자명한 불변의 원리를 확인해 준다. 이 생명체가 자라나서 충분히 결정된 독자적인 특성을 지닌 한 사람이 될 프로그램이,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수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전학은 증명해 주었다.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인간 생명의 모험이 시작되는데, 모든 잠재력이 각기 제자리를 발견하고, 행동할 태세를 취하려면 꽤 긴 시간이 요구된다. 크게 발전된 현대과학은 인공유산 지지자들을 본질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고 적어도 말할 수 있다. 또한 언제부터 인간이냐, 혹은 인공유산의 합법성 여부 등에 대한 결정적 판단은 생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윤리적 문제이다. 설령 태아가 인간이냐 아니냐에 관해서 아직 의문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감히 살인을 무릅쓴다는 것은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객관적으로 중죄이다. "인간이 될 자는 이미 인간이다."
4. 몇 가지 반대에 답한다
(14) 그러므로 신법(神法)과 자연 이성은 무죄한 사람을 직접 죽일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배격한다. 그런데 인공유산을 정당화하려는 이유들이 언제나 명백하게 악이라면, 또 하찮은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다. 어떤 경우, 어쩌면 상당히 많은 경우, 인공유산을 거부함으로써 혹 중대한 가치들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들이 보통으로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때로는 보다 중요하게 보이기조차 하기 때문에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이 문제가 극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이 어머니의 건강 혹은 생사를 좌우하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고, 자녀의 수가 하나 더 증가함으로써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특히 그 아기가 비정상아이거나 저능아일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때로는 명예를 크게 훼손하고, 사회적 지위 등을 잃게 하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만, 그 이유들 중 어느 것도 타인의 생명 - 비록 방금 출발한 생명이라 할지라도 -을 처분할 권리를 객관적으로 줄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할 뿐이다. 그 아기의 불행한 미래에 대해서 부모를 위시한 그 누구도 그를 대리할 수 없다. 그 아기가 아직 발생 단계에 있다 할지라도 부모의 권위로 그 아기의 생사를 좌우할 수 없다. 그 아기 자신도 성장했을 때 자살할 권리가 없듯이 그 아기가 아직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나이 때도 부모는 그 아기를 대신해서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은 너무나 근본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극히 중대한 위험이 있을 때도 그 가치를 보존한다.
(15) 여성해방운동이 본질적으로, 부당한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이 운동은 매우 건전한 근거 위에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문화적 배경에는 이 점에 관하여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그러나 아무도 자연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남성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에 대한 자연의 요구를 아무도 면제해 줄 수 없다. 더욱이 공인된 자유는 항상 타인의 권리들에 의해 제한된다.
(16) 성 해방의 주장에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성 해방이라는 표현이, 본능적 충동을 넘어선 진정한 사랑과 이성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획득되는 통어력으로 이해된다면, 아무런 반대도 있을 수 없다. 쾌락을 감소시키지 않고, 동시에 그것을 합당하게 향유하는 것만이 이 방면에 있어서 유일하고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종류의 자유는 정의를 침해하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 한다. 반대로, 만일 누가 성 해방을, 자녀의 출산을 지향하고 있는 부부생활의 근본적 방향이나 법칙을 무시하면서 포만점에까지 성적 쾌락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고 이해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전혀 비크리스천적이다. 그것은 인간답지 못한 일이다. 여하한 경우에도 그러한 생각은 인간의 생명을 - 비록 발생 단계에 있을지라도 - 파괴할 권리를 부여할 수 없으며, 짐스럽다는 구실로써 그 생명을 제거할 수 없다.
(17)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공업기술이 선뿐 아니라 악을 위한 미묘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매우 심각한 결과들을 초래할 가능성도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는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이다. 과학 기술은 인간 정신의 놀라운 업적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결코 윤리 규범과 무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므로 인간의 궁극목적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핵 에너지를 아무런 목적에나 무턱대고 사용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을 어떠한 뜻으로도 마음대로 조작할 권리는 부여되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정상적인 능력을 더욱 훌륭히 발휘시키고, 질병을 예방 혹은 치료하고, 인간의 보다 나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인간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조기 인공유산이 점점 더 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윤리적 평가가 그 때문에 결코 수정되지는 않는다.
(18) 산아제한 문제가 일부 가정, 일부 국가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문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공의회와 뒤이어 1968년 7월 25일 발표된 회칙 [인간의 생명]은 ´책임 있는 부모´에 관해서 언급했던 것이다. 공의회의 [사목헌장],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기타 교황문헌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어떠한 구실 하에서도 인공유산은 어느 가정이나 정치적 권위에 의해서나 합법적인 산아조절방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재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윤리적 가치들에 대한 손상은, 경제학적 및 인구학적 질서에 끼치는 어떠한 손실보다도 언제나 훨씬 중대한 악영향을 공동선에 끼친다.
5. 윤리와 법
(19) 윤리적 논쟁에는 거의 언제나 중대한 법률적 논쟁이 수반된다. 모든 국가는 법으로써 살인을 금지하고 벌하고 있다. 더욱이 많은 국가들이 이러한 단죄와 형벌을 특히 인공유산에 적용해 왔다. 최근, 인공유산 금지법의 해제를 바라는 여론이 높아졌다. 극히 엄격한 법령에 한해서, 특히 사생활에 저촉된다고 보일 경우, 완화하기를 원하는 일반적 경향이 이미 형성되어 있다. 또한 다원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이 인공유산을 단죄하고 있지만 인공유산이 보다 작은 악일 경우에 한해서는 적어도 인공유산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 그들의 의견이 아닌 의견을 따르라고 그들을 강요하는가? 특히 그 의견을 다수가 반대하는 국가에서까지 왜 강요하는가? 또한 인공유산 처벌법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적용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범죄는 너무나 흔해서 일일이 처벌할 수 없을 정도이므로 행정당국은 그런 일을 묵과하는 편이 더욱 현명한 처사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리고 시행되지 않는 법을 보존한다면 항상 권위와 다른 모든 법의 손실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비밀 인공유산을 행한 여성들은 장차 임신법의 손실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비밀 인공유산을 행한 여성들은 장차 임신할 때 대단히 위태로운 위험을 당하게 되며, 많은 경우 생명마저 위협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부언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입법자가 인공유산을 계속 죄악으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그 위법에 대한 제재를 가할 수 있을까 하고 주장하기도 한다.
(20) 이러한 논거들과 또한 곳곳에서 들려오는 다른 논거들은 아직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실정법이 윤리의 모든 분야를 총괄한다거나 모든 잘못을 전부 벌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아무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 보다 작은 악을 가끔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법의 변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주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처벌의 포기를 곧 허락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공유산의 경우에는 이 처벌의 포기가, 바로 이제는 입법자들이 인공유산을 인간 생명에 대한 범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살인은 지금도 항상 엄격히 처벌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 가지 의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거나 우위에 놓는 것은 법의 과제가 아니다. 태아의 생명은 그 어떤 의견보다도 우선한다. 아무도 사고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이 생명을 파괴할 수 없다.
(21) 법의 역할은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개선의 촉진을 돕는 데 있다. 각 사람의 권리를 보존하고 가장 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언제나 국가의 사명인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국가는 많은 잘못들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법이 모든 것을 처벌할 의무는 없지만 실정법보다 더 심오하고 장엄한 자연법을 거슬러서 행할 수는 없다. 이 자연법은 하느님이 하나의 규범으로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주신 것인데, 인간 이성이 이 규범을 명백하게 비춰주고 적정하게 성문화하고자 노력한다. 또한 누구나 이 규범을 더 잘 알아듣고자 항상 노력해야 한다. 이 규범을 거스르는 것은 언제나 잘못이다. 실정법이 처벌을 포기할 수는 있으나, 자연법에 위배되는 바를 옳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연법에 대한 위배는 이미 그 법이 전혀 법이 아님을 입증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22) 법 자체가 비윤리적일 경우, 크리스천은 결코 그 법을 따를 수 없으며, 인공유산의 합법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그런 법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이해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아무도 그러한 법을 옹호하는 선전운동이나 지지투표에 가담할 수 없다. 더욱이 그런 법의 시행에 협력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의사나 간호사가 인공유산에 직접 협력하게 하거나, 또한 크리스천 법과 자기의 직업위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23) 오히려 법이 해야 할 것은 언제 어디서나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를 인간답게 잘 받아들이도록 가장 불우한 계층의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생활조건과 사회 여건을 부단히 개혁해 나가는 일이다. 가정과 미혼모들을 위한 원조, 자녀수당, 사생아의 법적 지위와 입양을 위한 타당한 주선 등 이러한 일련의 적극적 정책은 인공유산에 대치하는 데 구체적으로 가능하고 영예로운 방법수행이 될 것이다.
6. 맺는 말
(24) 신법에 순응하여 자기의 양심을 수호하기란 언제나 쉬운 길은 아니다. 무시할 수 없는 무거운 부담과 희생이 요청될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 때로는 영웅적 용기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한 인간이 진정으로 발전 완성되려면 정직과 진실 속에 있는 양심에 한결같이 충실하고 그 길을 통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호소하는 바는 수많은 부부, 가정, 어린이들이 인간적으로 절망에 처해 있고 그런 상황 때문에 짓눌린 그들을 구해줄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진지한 노력을 권고하는 바이다.
(25) 그리스도교적 생명관은 현세 생명 가치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현세생활로써 다른 생명을 준비하는 것이고 죽은 다음에도 심판을 받아야 하는 중대성을 자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구의 어린이를 키우는 데 막대한 고통이 따른다 해도 절대적 불행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마태 5,5)라고 역설을 선포하셨다. 이 세상에서 슬픔과 비참이 없는 것으로써 행복의 척도를 삼는다면 복음에 위배된다.
(26)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이러한 고통과 비참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감정을 가진 모든 사람, 더욱이 모든 크리스천은 이러한 불행의 극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법칙이며, 그 첫째 노력은 언제나 정의 구현에 있어야 한다. 결코 아무도 인공유산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대신 무엇보다도 인공유산의 원인들을 제거해야 한다. 여기에는 정치적 활동이 포함되며, 특히 이런 일은 법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정신풍토에 작용해 들어가야 하고 가정과 어머니들과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강구해 나가야만 한다. 의학의 발전에 따른 생명에 대한 공헌은 큰 것이었다. 이러한 발전은 앞으로도 계속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들의 사명은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위하고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동시에 바라고 싶은 것은 제도적으로도 이에 대한 보장책이 보다 발전되기 바라며 보장의 제도가 결핍되었을 때는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관대를 다하여 여러 가지 원조를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란다.
(27) 윤리적으로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사상적인 차원에서 대치하는 투쟁의 노력이 함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생식을 불행한 것이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생각하려 드는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사실상 문화의 모든 형태가 대가족제도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고, 산업화, 도시화된 문화에서는 대가족제도는 크나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최근, 책임감 있는 부모와, 참으로 인간답고 크리스천다운 지혜를 다 하라고 수차에 걸쳐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교적인 현명도 고결한 용기를 내포시키지 않는다면 참다운 지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와 사회에 새 가족을 탄생시키는 생명 전달에 있어서 창조주와 협력하는 위대한 사명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을 보호하고 옹호하기 위한 근본적 배려를 하고 있다. 분명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0,10). 그러나 모든 차원에 있어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육체적 생명은 인간에게 있어 존재의 시작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다. 지상의 이 현세 생활에는 죄가 들어왔고 그것이 늘어 고통과 죽음으로 짓눌리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짐을 친히 지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고통과 죽음 그 자체를 바로 부활에 이르는 방법이 되도록 마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로마 8,18)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를 그렇게 비교한다면 다시 바오로와 함께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극히 가벼운 것이며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Ⅱ고린 4,17)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4년 6월 28일, 서명자인 신앙교리성성 차관인 본인을 접견하시고 이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을 인준, 확인해 주시고 반포하도록 명하셨다.
1974년 11월 18일, 성 베드로 바오로 성전 축성 기념일,
신앙교리성성 장관 프란치스꼬 세퍼 추기경
차관 히에로니모 하메르 대주교
(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 원문 출처,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