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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선조
의
숨결
을 따라
성지순례길-수도권지역
삼복의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
는 날, 인천역 앞에 섰습니다. 바
로 앞으로는 차이나타운의 화려
한 거리가 펼쳐져 있군요.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한국전쟁 때 인천
상륙작전을 펼쳤던 맥아더 장군
의 동상이 서 있는 자유공원이지
요. 대로를따라잠시걷자우람한
한중문화관과닻줄로보이는쇠사
슬이 쌓여있는 큰 공장 사이에 인천교구 해안 본당이 관할하
는 성지의 간판이 보이네요. 워낙 좁은 땅에 자리를 잡고 있
어서 지나치기 십상이군요. 골목 같은 입구로 들어가자 폭은
좁지만 15미터에달하는드높은경당이환합니다.
조선시대에 종4품의 수군만호가 있던 제물진두는 1845년
에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서품을 받기 위하여 작은 목
선을 타고 중국 상하이로 떠난 곳이자 병인박해 이후 열 분
이 순교한 곳입니다. 1868년에 부평에 살던 ‘순교자들의 행
적 증거자’인 박순집 베드로의 이모인 김씨, 남편 손넙적이
베드로, 사위 백치문 사도요한, 그리고 행적 미상인 이 마리
아의 손자 등 4명이 체포되어 한양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여기서 참수형을 받았지요. 그리고 1871년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의 토마스의 아들 이연구와 이균구 형
제가 인천 바닷가에서 미군 함정을 살피다 체포되어 처형되
었고요. 이어 인천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겸의 부인
정씨와 정씨의 손자 이
(손)
명현, 그리고 이름만 전하는 백용
석과김아지도이곳에서순교하였지요.
제물진두에서의 순교는 1866년에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
령관인 로즈가 이끄는 군대가 강화도에 침략한 병인양요 때
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어 1866년에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
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나자
1871년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략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은 이 신미양요가 터진
원인을 천주교인에게 두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포도
청에서 하는 일이 요사이 매우 허술하여 사악한 무리들을 없
애지못하므로서양오랑캐들이침략해오게하였다. 이후에는
더욱 잘 살펴 나쁜 무리의 종자가 남아있지 못하게 하라.’
(「고
종실록」 1871년 5월 25일)
또한흥선대원군은척화비를세워서
양 오랑캐와 싸우는 한편 이에 부합하는 자들을 척결하라고
명령하였고요. 이에 따라 미국 군함과 접촉을 시도하였던 이
승훈의 증손자들이 여기서 참수되었던 겁니다. 당시의 관문
이었던한강변의양화진두와제물진두포구에서천주교인들
을공개처형함으로써본때를보이려하였던것이지요.
긴의자가놓인경당에앉아행적
조차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품었던
뜨거운 신심을 되새겨봅니다. 작고
비좁은 경당에 어울리는 순교자들
의 삶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군요.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고 남이 알아
주지도 않는 일에 목숨을 바친 치명
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피 흘려 하느님을 증거하였던 분들
을 기리는 성지에서 흘리는 삼복더위의 땀이 무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교수
제물진두순교성지외관
제물진두순교성지
(인천광역시중구제물량로 240)
제물진두순교성지경당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