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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가을 어느 날 회사 가톨릭 교우회 모임에서 남
양주에 있는 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저도 세례를 받은
직후였던 터라 어머니를 모시고 동행했습니다. 미사를 드
리고사내교우회형제님들과인근식당에갔습니다.
식사 중 한 분이 어머니에게 “어머니, 신동진 루도비코
도 교우회 합창단에 들어오라고 얘기해 주세요”라고 부탁
했는데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으셨
습니다. 저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표현이셨던 건데요, 어
머니가 아들을 생각하는 모습이 재밌다는 듯 모두들 유쾌
하게웃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나 다신 거기 안 갈래.” 하셨
습니다.
“왜요, 불편하셨어요?”
“불편했어.”
어머니는아프고쇠해지시면서간단하고직설적으로말
씀을 하셨습니다. 길게 얘기할 에너지가 없으셨던 겁니다.
우리 집 식구 중 가장 사교적이고 유연했으며 말씀을 즐기
던분이라더욱마음이아팠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기 추모 음악회
가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습니다. 퇴근 무렵 회사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와 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객석은
관객들로꽉찼고좌석이좁게만느껴졌습니다. 두시간넘
는 공연이라 어머니를 모시고 중간에 나가야 할 것만 같았
습니다. 하지만공연내내어머니는힘든내색을하지않으
셨습니다. 공연이끝나고집으로오는길에물었습니다.
“어머니, 힘들지않으셨어요?”
“아니하나도….”
표현이 직설적으로 변해가던 어머니였지만 가족은 여전
히 주님이었고, 마찬가지로 주님과 성모님, 김수환 추기경
님까지도 어머니에게는 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연장이
좁고, 익숙지 않은 음악이 길게 흘러나와도, 보청기와 음
량이맞지않아도힘들다고할수가없으셨던겁니다.
어머니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을 본 건 돌아가시기 20일
전이었던 그해 1월 1일,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간 날이었습
니다. 어머니는 떡국과 명절에 저희 집에서 늘 먹던 LA갈
비, 물김치 등을 차리시고, 손수 안방에서 큰 상도 들고 오
셔선 직접 펴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평소 안 하던 말씀
을하셨습니다.
“널내가낳았다는게믿기지않아….”
어머니의 신체 기능들이 떨어지던 무렵,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신 어머니에게는 맞지 않는 질문을 무심코
해봤습니다.
“어머니는이세상다시태어나고싶으세요?”
“너를아들로만난다면또태어나고싶지.”
어머니, 우리 주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두
손모아간구해봅니다.
주님, 가정을위해저희가족을오로지주님처럼성심으
로섬겼던어머니요안나에게영원한안식을주소서.
말씀
의
이삭
가족이주님이자성모님이었던어머니
신동진
루도비코
| 아나운서
나를이끄는
성경구절
박재은
율리아나
신정3동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