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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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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부부는 사이가 좋은 편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

했던 헬레나는 저에게 꼭 필요한 책이나 영화를 종종 추천

해 줍니다. 코로나로 저녁 모임이 없어져 일찍 퇴근할 수

있었던 지난 3월부터 한동안 헬레나가 추천해 준 드라마

를 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의 아저씨>와 <동

백꽃필무렵>은도시와마을공동체를연구하는저에게꼭

맞는 드라마였습니다. 가족처럼 지내는 이웃들이 서로 돕

고 상처를 치유해 주는 따뜻한 공동체에 찐한 감동을 느꼈

습니다. 보는 내내 마음이 짠했던 <눈이 부시게>는 장인어

른 돌아가신 뒤 저희 집에 모신 장모님을 이해하는 데 많

은도움이된드라마였습니다.

사서 출신답게 그때그때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아내가

있어 든든합니다. 29년 꽤 긴 시간을 부부로 살았는데도

여전히 연애 시절의 설렘이 남아있습니다. 술이 과해 코를

심하게 고는 날을 빼면 늘 함께 잡니다. 새벽에 잠을 깨면

곁에서 곤히 자는 헬레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사랑

스러워 볼을 살짝 쓸어주고 어깨와 등도 다독여줍니다. 가

까이 다가가면 잠결에도 포근히 안아주며 내 등을 두드려

줄 땐 단단히 묶인 매듭을 보듯 우리가 서로에게 소속된

부부라는걸느낍니다.

우리부부사이가늘이렇게좋았던것은아닙니다. 신혼

초에는 많이 싸웠습니다. 더없이 사랑스럽던 연인과 혼인

해서함께살아보니어쩌면이렇게나와다른지황당했습니

다. 생김치를 좋아하는 제게 풀냄새 나는 생김치 말고 신김

치를 먹으라고 합니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어야 맘이 편

하고, 할일을끝낸뒤에야놀든쉬든해야한다고생각하는

저와 달리 헬레나는 설거지 그릇을 수북이 쌓아놓은 채 드

라마를 보곤 했지요. 화를 내고 또 부탁도 해봤지만 소용없

었습니다. 싸워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접고 포기하기로 마

음먹어도순간순간화가치밀면또싸워야했습니다.

서로 다른 것 때문에 싸워야 했던 악순환을 깨끗이 끝

내준 게 ME 주말이었습니다. 중2 큰아들부터 여섯 살 막

내딸까지 네 아이를 성당 이웃들께 맡기고 다녀온 2박 3일

동안 둘이 참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 게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고, 상대방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나와 다른 걸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깨닫

고 나니, 내게 없는 배우자의 장점이 보였습니다. 단점을

꼬집어 탓하는 대신 장점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니 사랑 듬

뿍 받고 자라는 꽃나무처럼 함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가

장 가까운 이에게 존중받으니 자존감도 당연히 커졌고요.

부부관계가 좋아지니 자녀와의 관계도 덩달아 좋아졌습니

다. “엄마랑 아빠랑 사이좋은 게 참 고마워요.” 언젠가 막

내딸에게들은이말이얼마나고마웠는지모릅니다.

우리는 ‘다름’ 때문에 싸웁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닌 그

저 다름일 뿐입니다. 나와 아주 많이 다른 배우자를 만난

덕에 까칠하고 경직되고 지나치게 예민했던 제가 이만큼

이나마 부드러워졌습니다. 그저 인정했을 뿐인데, 다름의

축복을넘치도록받았습니다. 다름은축복입니다.

말씀

이삭

다름의축복

정석

예로니모

| 서울시립대학교교수

조수연

가브리엘 | 창4동성당

나를이끄는

성경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