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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ਔ ੈ

말씀

이삭

김해선

비비안나

|

시인

붉은포도밭을지나며

몇년전초여름에 40일동안산티아고순례길을걸었습

니다. 그날도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어서 숙소가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6월 10일쯤 되는 날이었지만,

그날오후는가을날씨같았습니다. 숙소에짐을풀고슈퍼

마켓으로 갔습니다. 작은 마을에 있는 조그만 슈퍼마켓이

었는데 여행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는 청사과 두 알과 요플레, 납작 복숭아 몇 개를 다음날

간식으로사들고나와동네를산책했습니다.

오래된 수도원 성당이 보였습니다. 마당에는 나뭇잎들

이 바람에 굴러다녔고 검은 수단을 입은 키 큰 신부님께서

마당을쓸고계셨습니다. 저는가만히작은성당안으로들

어갔습니다. 성당벽과천장에금이간곳이많이있었습니

다. 시멘트로 덧칠해져 있었고 아무도 없는 성당 창밖으로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창문 위에 거미줄

이 걸쳐있는 고요한 성당에서 저는 저도 모르게 검은 봉지

에담긴사과와요플레를만지작거리며예수님께말했습니

다. ‘사람도 없는 성당 마당을 쓸고 계신 푸른 눈의 수사신

부님처럼 저도 저의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저의 글을

세상이 알아주는 것과 알아주지 않는 시선에서 벗어나, 저

도 밖에서 혼자 마당을 쓸고 계시는 수사신부님처럼 저의

길을묵묵히갈수있게도와주세요.’

그리고 며칠 후 햇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포도밭을 지나

면서 ‘시 등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기쁘거

나 설레지 않았습니다. 17년 동안 신춘문예와 잡지에 투고

해서떨어졌기때문인지오히려조금착잡한심정이었습니

다. 매일 새로운 길을 걷는 순례의 길에서 만난 이 기쁜 소

식에 감사할 줄 모르는 제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름 모를

작은 수도원 성당에서 했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왜 내가

원했던것을받았는데도기뻐하기보다는침울해할까, 스스

로 되묻곤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등단 소식을 들었지만,

너무많은시간이지났고요. 다른사람들보다훨씬늦게등

단한 저에게 원고 청탁 기회도 잘 오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이걱정되는것도사실입니다. 지난번수도원성당맨뒷자

리에서했던기도도진심이지만, 지금현실을보고있는이

마음도 진심입니다.’ 예수님께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

하게고백하고서야마음속침울함이빠져나갔습니다.

요즘도 가끔 수도원 성당 마당을 혼자서 묵묵히 쓸고

계시던 등이 굽은 수사신부님의 모습이 스쳐갑니다. 그리

고 글쓰기가 뜻대로 잘 안될 때마다 낡고 오래된 성당 뒷

자리에서 드렸던 기도를 떠올리며 저의 초심을 마주 보곤

합니다.

복음

묵상

캘리그라피

_

이수미

율리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