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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은 원초적 성사입니다.”
사람이자신을표현하고하느님을닮은풍요로운사랑을표현할수있는것은우리에게육체가있기때문입니다. 우리의몸은
보이지않는하느님의신비를효과적으로이세상에전해주는표지로서원초적성사입니다. 우리의몸은남자와여자가상호
보완성·의존성으로인해서로사랑해야하는선물이면서자녀출산을위한소명에로불렸음을나타냅니다.
글_
생명위원회
생명운동
페레올 주교님에 대한 이런 글이 기억납니다. “10년간
조선 교회 이끈 페레올, 그의 세 가지 업적” 궁금한 마음으
로하나하나의업적을꼼꼼히읽어보기로합니다.
“페레올주교의업적은크게세가지로평가할수있다. 첫째, 조선인성
직자양성의결실을거뒀을뿐아니라그기초를놓기위해조선에신학교를
설립한공로다. 둘째, 「기해·병오박해순교자들의행적」을작성해이들의시
복시성재판에결정적증거자료를남긴점이다. 셋째, 바다를통한, 보다안
정적인조선입국로를개척한부분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2월5일자)
2018년지금, 오늘을사는우리가한국가톨릭교회역사
안에서 제일 먼저 기억하는 첫 열매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
양업 신부님입니다. 바로 이 두 분에게 1844년 차부제품과
부제품을 주었던 분은 바로 페레올 주교님입니다. 1845년
김대건신부님에게사제품을준분도페레올주교님입니다.
조선이라는 선교지에서힘들게 신학생을 선출하고 조선
인 성직자를 양성하며 결국엔 그들에게 첫 번째 신부님과
두 번째 신부님을 선물해주신 페레올 주교님의 배려를 기
억합니다. 언젠가 베트남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을 때도 우
리나라 수녀님들이 사복을 입고 현지 출신 수녀님들을 양
성하고 스스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을 보고 감
동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173년 전, 1845년에 우리가
선물 받았던 조선인 신부님처럼 이제는 우리가 선교지에
나가서 그 나라 공동체를 지탱해주고 스스로 활동하게끔
도와주는 것은 정말 꼭 필요한 첫 번째 우선순위임을 깨닫
게 합니다. 더불어 페레올 주교님의 두 번째 업적도 눈여
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교님의 임기중에 있었던 기해박
해
(1839년)
, 병오박해
(1846년)
는 가톨릭 4대 박해에 속해있는
큰 박해의 시기였습니다. 주교님은 이때의 순교자들의 행
적에 대한 중요한 증거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신 분입니다.
큰 박해를 두 번이나 겪으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던 그때,
순교자들에 대한 위대한 행적들은 당시의 목격자들이 살
아있을 때 증언하는 것이 제일 정확하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압니다. 하지만 생각을 한다고 해서 모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때의 자료들은 후에 순교자들의 시
복시성에 직접 자료로 인정되고 있음은 페레올 주교님 덕
분입니다. 당장은 큰 박해 중에 있으나 훗날 우리 교회가
순교자들을 기억하게 하신 페레올 주교님의 마음을 기억
합니다. 당신의 그 첫걸음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서울대교
구는 사제가 900명이 넘는 큰 교구가 되었습니다. 고맙습
니다우리주교님.
역대
교구장
이도행
토마스신부
올한해동안서울대교구역대교구장에대해아주작은퍼즐이라도함께찾아보고, 그분들의마음을공감하는시간을가졌으면좋
겠습니다. 아무리좋은것이라도직접찾아보고, 생각하고, 공감하지않으면나와상관없기때문입니다. 오늘의서울대교구가있기까
지헌신하신교구장들의삶이주는울림을전합니다.우리가찾은서울대교구세번째교구장님은페레올주교님입니다.
03
3대교구장
(프랑스) 1839년~1853년
페레올
(Ferreol, 고)
주교
· 1838년9월14일보좌주교로임명.
·이듬해 9월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으나,
1843년에가서야임명장을받고 12월 31일
에성성.
· 1845년 10월 12일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
부의인도로조선에입국.
· 1853년2월3일에과로와병으로선종하여
미리내김대건신부의무덤옆에안장됨.
사진한국교회사연구소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