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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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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선조

숨결

을 따라

성지순례길-수도권지역

낙엽이 지는 날, 병목안 마을에 들어섭니다. 골짜기의 생

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답니다.

2km 남짓한 길을 따라 올라가는 양옆으로 산들이 이어져 있

어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군요. 울긋불긋한 단풍으

로 물든 산을 끼고 걷다 보니 어느새 수원교구의 수리산 성

지에 도착합니다. 신앙 선조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만한

깊은 산골이네요. 땅이 척박하여 담배를 키워 내다 팔아서

담배촌이라고 불렸던 까닭도 알만하고요. 순례자 성당 위쪽

에 복원한 최경환 성인 고택을 돌아본 뒤, 그 맞은편 개울에

놓인 경환교 다리를 건넙니다. ‘최경환 성인 묘소 0.17km’라

는표지를따라산비탈을오르며성인의삶을반추해봅니다.

수리산 뒤뜸이

교우촌은 1837

년경에 형성되었

습니다. 당시 공

소 회장이던 성

최경환 프란치스

코와 복녀 이성례 마리아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교우 집안에

서 태어나 혼인하였지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가산을 포기

하고 고향을 떠나 한양의 벙거지골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강

원도 금성과 경기도 부평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였던 겁니다.

1836년에는 장남인 최양업 토마스가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

으로 발탁되어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갔고

요. 1839년 기해박해가 터지자 7월 31일에 포졸들이 이곳에

들이닥쳐 40여 명의 교우가 모두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

습니다. 35세의 최경환 회장이 앞장서서 더위에 시달리며 먼

길을 걷는 교우들을 독려하였지요. 옥에 갇힌 그는 태장 340

대와 곤장 110대를 맞았고, 최후로 치도곤 50대를 맞고 9월

12일에순교하였습니다.

이성례 마리아 역시 아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낸 대역 죄

인이라는 이유로 젖먹이를 비롯한 자식들과 함께 투옥되었

습니다. 그 와중에 젖먹이가 굶어 죽자 남은 자식 넷을 살리

기 위하여 배교하겠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하지만 이

내 포도청으로 되돌아가 자진하여 투옥되었습니다. 어린 자

식들이 옥에 찾아와 울먹였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았지요. 결

국 그녀는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당하였습

니다. 시구문 밖

에 버려진 그녀의

시신은 찾지 못하

였고요. 그래서

지금 이곳에 묘가

하나만 있는 겁니

다. 그 후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984년에 시성되었고, 이성

례마리아는 2014년에시복되었지요.

성인 묘소 위쪽에 있는 성모상 앞의 노란 국화 화분이 소

담스럽습니다. 문득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제학과 예조판

서를 지낸 이정보의 시조가 떠오르네요.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다지내고 / 낙목한천에네홀로피었난다 /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가을날의 서리 속에서 소나무

나 대나무 못지않은 절개를 뿜어내는 국화가 성인과 복녀의

삶을 닮았군요. 남이 알아주지 않는 산골에서 신념을 지키고

자 하였던 분들, 하나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고자 하였던

분들의의연한모습을말입니다.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교수

최경환성인묘소

수리산 성지

(경기도안양시만안구병목안로 408)

성최경환프란치스코

복녀이성례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