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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8일

3

말씀

이삭

작가로 살아가면서 신앙과 가장 부딪히는 마음이 뭐

냐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교만’입니다. 분명 주님께 받은

은총으로 과분한 인정을 받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만 저 자신을 특별한 부류로 착각하게 되니 말입니다. ‘누

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은

총은 누리고 봉사는 뒷전이기 일쑤지요. 물론 봉사라는

걸 아주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자모회 활동 조금, 반장

활동 조금, 성서모임 봉사 조금. 이것저것 찔끔찔끔 흉내

만 내는 신앙생활을 제법 오래 이어갔으니까요. 그러다

몇 년 전, 그나마 해오던 봉사들을 일시에 정리하고 홀가

분하게 ‘주일만 지키는 신자’로 돌아갔습니다. 이유는 있

었습니다. 물리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이어지면서

일에서도 생활에서도 실수가 계속됐거든요. ‘지금 뭐 하

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는 해오던 모든

봉사를 포기했습니다. 아니죠. 포기라는 단어는 놓기 어

려운 것을 놓았을 때 쓰는 말이니까 적절하지 않습니다.

저는 봉사를 때려치웠습니다.

처음엔 신앙심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저

런 일에 쫓기지 않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부담을 내

려놓고 보니 곁에 있는 교우들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무

엇보다 드디어 작가라는 ‘고고한 신분’을 회복한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제가 주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아이

들 간식은 만들어졌고, 제가 없어도 구역장님께서 저희

반원들을 잘 챙겨주셨습니다. 시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게 흘러갔습니다.

주일 신자로 돌아가고 몇 개월이 흘렀습니다. 아직 후

임 반장이 정해지지 않아 성사표를 돌리기로 해놓고는 차

일피일 미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하필이면 그해 들어

가장 추운 날 성사표를 돌리게 되었지요. 오랜만에 만나

는 어머님들은 언 손을 붙잡아 호호 불어주시고, 보고 싶

었다고 안아주시고, 글은 잘 쓰고 있냐 물어봐 주시고,

추운 날 고생한다며 김 한 톳, 양말 한 상자, 녹차 봉지

같은 선물들을 쥐여주셨습니다. 달랑 성사표만 들고 나섰

던 제 양손이 선물들로,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풍성

해졌습니다. 고작 2년, 억지로 떠맡아 한 일이지만 주님

께서 함께하셨기에 그것은 사랑이었고 다시 사랑으로 돌

아왔던 겁니다.

이 글이 훈훈하게 마무리되려면 저는 그날로 다시 봉

사를 시작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봉사를 쉬

고 있습니다. 저에게 딱 맞는 특별한 봉사가 주어질 거라

는 교만한 마음과 여전히 싸우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

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

는 일, 그 어려운 걸 오늘도 묵묵히 해내고 계신 수많은

봉사자들을 정말 존경합니다.

김나영

요셉피나

| 작가

아무나할수있는일,누구도하기싫은일

역대

교황님

말씀

| 레오 13세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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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연

세실리아 | 홍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