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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선조

숨결

을 따라

성지순례길-수도권지역

맑고 푸르른 날, 빨간 덩굴장미가 길가 여기저기서 고개

를 내밀고 있군요. 장미화관을 뜻하는 로사리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슬그머니 주머니에 있는 묵주를 꺼내드니 다

소 먼 길에 나선 순례자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포

천시내에서 반월교를 건넙니다. 바로 앞으로 포천천과 구읍

천이 만나는 지점에 ‘홍인

레오 순교터’라는 표지판

이 보이네요. 춘천교구 포

천성당에서 관리하는 성

지입니다. 아담한 공터에

순교현양비가 서 있군요.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1801년)

는 한양에

서 포천으로 내려와 살면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지

요. 초기 교회 설립의 주역으로 양근에 살던 권철신 암브로

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가 그의 고종사촌

이었으며, 마재에 살던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복자 정철상 가롤로가 그의 사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천주교와 접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홍교만은 천주교를 학문

으로 받아들였을 뿐, 신앙으로 수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러던 중 그의 아들인 복자 홍인 레오

(1758-1802년)

가 자신에

게 교리를 배운 뒤 먼저 신앙생활을 하였던 겁니다. 홍인은

부친을 권면하는 것이 효도라 여기고, 천주교에 대한 부친

의 의심을 풀어주며 입교하기를 설득하였지요. 쪽에서 나온

푸른색이 쪽보다도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딱 들

어맞았네요. 마침내 부자는 1794년 말에 입국한 복자 주문

모 야고보 신부에게 함께 세례를 받았답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터지자 부자는 사돈인 정약종의 책

상자를 집안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교우가 그 상자를 다

른 곳으로 옮기다 붙들리면서 부자 또한 체포되었지요. 홍교

만은 한양 포도청과 의금부로 끌려가 신문을 받으며 “저는

이미 예수의 강생을 알고 있으니 이제 갑자기 뉘우쳐 예수가

그르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4월 8일 서

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한편 홍인은 포천현 감

옥에 갇혔다가 경기감영과 포도청과 형조로 이송되어 문초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이듬해 1월 30일 고향인 포천 저자거

리에서 참수형을 당하

였지요. 붉은 피를 뿌

려 포천 지역에 신앙

의 꽃을 피웠던 겁니

다. 형조의 사형 선고

문이강경합니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

다. … 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왕방산 기슭의 포천성당 안에 영광의 화관을 쓴 부자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네요. 복자들을 대하며 우리는 오늘

어떠한 죄를 짓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나 자신과 가문의 영

달을 위한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정의를 증거하기

위한 죄

(?)

를 얼마나 충실하게 짓고 있는지 성찰하게 되는군

요. 불의에 맞서 진리를 선포하고,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서

만 번 죽임을 당해도 아깝지 않은 죄 말입니다.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홍교만과홍인

염화강

포천형장터

(경기도포천시군내면구읍리 7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