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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성지

(경기도광주시중부면남한산성로 763-58 )

세찬 바람에 눈발이 마구 흩날리는 남한산성은 을씨년스

럽기 그지없습니다. 경사는 가파르고, 길은 미끄럽네요. 480

년 전 겨울 청나라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

하자 인조는 이곳으로 피신하여 40여 일 넘게 항전하였지요.

남한산성은해발 500m가넘는험준한자연지형을따라둘레

8km가넘는성벽을쌓아외적이쉽게공략할수없는곳이었

거든요. 그러나 1637년 1월 30일내외의압력에밀린인조가

성문을열고항복하여민족의비극어린곳이되었지요.

그로부터 200여 년

이 흐른 뒤 이곳은 광

주, 용인, 이천 등지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 와 고문당하고 처

형되는 곳이 되었답니

다. 광주 유수가 여기

에 거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 선조들은 광주 쪽으로 난

좌익문이라 불리던 동문으로 끌려 들어와 옥에 갇혀 고난당

하다 처형되었지요. 광주 의일에 살다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 토마스가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

습니다. 그 뒤를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300

여위의순교자가배출되었던겁니다.

특히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병인박해 때 치명한, 이천 단

내에 살던 정은 바오로와 그의 재종손 정양묵 베드로가 눈에

띕니다. 광주 포교들은 정은의 집에 들이닥쳐 노인이라 걸

어갈 수 없다고 하며 소를 끌어내 그 위에 태워갔습니다. 그

러나 10리 남짓한 오천에 가자 소를 팔아 돈을 챙기고는 70

리나 되는 광주 영문까지 밤새 걷게 하여 다음날 도착하였지

요. 엄동설한에 변변치 않은 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채 그처

럼 멀고 험한 길을 걸었으니 그 고통이 어떠하였을까요. 남

한산성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며 얼마나 미끄러지고 쓰러

졌을까요. 그 소식을 들은 정양묵 베드로는 광주 영문으로

달려가 “나도 천주교 신자니 작은 할아버지와 함께 죽여주시

오”라고자현하였습니다.

당시 포졸들은 천주를 증거하는 신자들을 참수, 교수, 장

살 등으로 죽였는데, 이 두 사람은 백지사로 처형하였습니

다. 우선 죄인의 손발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한데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그 다음에 얼굴에 물을

뿜고 창호지를 한 장씩 붙여 숨이 막

히게 하는 겁니다. 백지 두세 장이면

끝났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까요. 포졸들은 그들이 걸어 들어왔

던 동문 언덕에서 시신을 굴려 성 밖

으로 흘러나가는 개울에 버렸습니

다. 물이 흘러나가는 동문의 수구문

(水口門)

이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

(屍口

門)

으로불린까닭이여기있답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앞에 우뚝 선 순교자현양비에 눈이 쌓

이고 있군요. 동지섣달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겨울날 청태

종의 위력 앞에 무릎 꿇었던 인조, 반면 추위와 배고픔과 고

문에도 굴하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의연한 모습이 대비되어

비치네요.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

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듯합니다. 남문 근처에 서 있는

‘흥선대원군을 잊지 말자’는 공덕비가 순례자의 발길을 무겁

게합니다.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성밖에서본동문

시구문

(屍口門)

성안에서본동문

신앙선조

숨결

을 따라

성지순례길-수도권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