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ٱ ؽ
조동원
안토니오신부
|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교수
과
학칼럼
言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재밌는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받아들인
뜻은 이러합니다. 과학은 엄격하고 명확한 범위와 방법론 안에
서 자신이 풀어낼 수 있는 것만 말하며, 철학은 우리가 상식적
으로 다 알고 있는 것들을 굳이 끄집어내어 어렵게 말하는 것
이고, 종교는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일종의 신비의 영역으로
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름대로 종교, 철학, 과학의 특징을 단순화해서 절묘하게 표현
한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철학, 과학에 대해 갖
고 있는 피상적 ‘이해’와 ‘오해’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확실히 과
학, 특히 자연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철저히 그 안에서만 움직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한 엄격함과 명확함, 단순함은 한편으로 오늘날 자연과학
의 눈부신 성공을 견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과학의
시야를 대단히 좁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어떤 이
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그 강력하지만 제한된 도구를 이용하여
과학이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까지 말하려 합니다.
철학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당연하게,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
이는 것들을 애써 끄집어내어 질문하고 고민합니다. 그래서 때
로는 철학이 현실과 떨어진 고담준론으로 보이기도 하고 무의
미한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생
각이나 경험, ‘상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우리
로 하여금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좀 더 깊은 눈으
로 바라보게 하며, 그리하여 일상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철학의 말
(言)
은 필요 없
는 말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반드시 필요
한 말
(言)
입니다.
종교는 초월적인 것, 저 너머의 세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인간의 말을 무한히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
앙에서 말
(言)
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말로 담을 수 없는 분으로 우리의 언어를 무한히 초월해 계시
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끊임
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 오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분의 말씀
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남김
없이 들려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분, 곧 사람이 되신
말씀 덕분에 우리는 감히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이어질 열두 번의 연재를 통
해 저는 신앙과 과학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진리를 향한 열
망에서, 혹은 진리 그 자체에서 탄생하여 자라난 이 둘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며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 말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철학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왜
냐하면 철학이야말로 온전하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유일하
게 신앙과 과학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쉽지 않은, 그러나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말
(言)
의 여정을
조심스럽게 시작합니다.
종교
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
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
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