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ous Page  5 / 13 Next Page
Information
Show Menu
Previous Page 5 / 13 Next Page
Page Background

ƾ

ٱ ؽ

조동원

안토니오신부

|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교수

학칼럼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재밌는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받아들인

뜻은 이러합니다. 과학은 엄격하고 명확한 범위와 방법론 안에

서 자신이 풀어낼 수 있는 것만 말하며, 철학은 우리가 상식적

으로 다 알고 있는 것들을 굳이 끄집어내어 어렵게 말하는 것

이고, 종교는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일종의 신비의 영역으로

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름대로 종교, 철학, 과학의 특징을 단순화해서 절묘하게 표현

한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철학, 과학에 대해 갖

고 있는 피상적 ‘이해’와 ‘오해’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확실히 과

학, 특히 자연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철저히 그 안에서만 움직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한 엄격함과 명확함, 단순함은 한편으로 오늘날 자연과학

의 눈부신 성공을 견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과학의

시야를 대단히 좁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어떤 이

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그 강력하지만 제한된 도구를 이용하여

과학이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까지 말하려 합니다.

철학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당연하게,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

이는 것들을 애써 끄집어내어 질문하고 고민합니다. 그래서 때

로는 철학이 현실과 떨어진 고담준론으로 보이기도 하고 무의

미한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생

각이나 경험, ‘상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우리

로 하여금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좀 더 깊은 눈으

로 바라보게 하며, 그리하여 일상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철학의 말

(言)

은 필요 없

는 말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반드시 필요

한 말

(言)

입니다.

종교는 초월적인 것, 저 너머의 세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인간의 말을 무한히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

앙에서 말

(言)

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말로 담을 수 없는 분으로 우리의 언어를 무한히 초월해 계시

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끊임

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 오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분의 말씀

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남김

없이 들려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분, 곧 사람이 되신

말씀 덕분에 우리는 감히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이어질 열두 번의 연재를 통

해 저는 신앙과 과학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진리를 향한 열

망에서, 혹은 진리 그 자체에서 탄생하여 자라난 이 둘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며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 말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철학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왜

냐하면 철학이야말로 온전하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유일하

게 신앙과 과학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쉽지 않은, 그러나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말

(言)

의 여정을

조심스럽게 시작합니다.

종교

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

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

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