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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25일 서울주보 2면

에는 가르멜회 수녀님 두 분의 사진

과 함께 ‘서울 성모영보 깔멜회 창

립자 수녀 선종’ 소식을 전하고 있

습니다.

“서울 성모영보 깔멜회의 창립자

자비의 마리 막달레나

(마들렌)

수녀님

(프랑스인)

께서 12월 5일 오후 8시 40

분에 선종하셨다. 수녀님은 수도 생

활 54년 중 프랑스에서 14년, 나머

지 40년은한국에서….

(중략)

6.25 전쟁 때 3년간 북한으로 피

랍돼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셨다가 모스크바와 프랑스를

경유해서 1954년 1월 29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신 후 여

생을마쳤다고쓰여있습니다.

서울 성모영보 가르멜회의 설립자인 프랑스 수녀님 5명

은 1950년 6월 27일서울이함락되기전, 메리놀수도회의

바이런 주교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탈출하라고 연

락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럽인 수녀들만 탈 수 있다는 전갈

에 한국 수녀들과 생사를 같이하기 위해 탈출을 포기하고

남을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6.25 전쟁 때 북한군은 서울을

사흘만에함락한후정부인사, 경찰, 군인가족, 지주들을

인민재판이란 이름으로 마음대로 처형하였습니다. 북한군

은 서울 침공 초기부터 교회 인사들을 회유하여 선전 선동

에 동원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명동대성당의 미

사도 8월 6일까지는 주일미사가 겉으로는 정상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하지만 7월 초순부터 북한군은 이미 주교관,

수녀원, 고아원 등 교회 시설들을 강점했고 한국과 외국인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체포해 가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11월, 전세가 역전되자 서울 등 남

한 지역에서 체포했던 성직자와 수

도자, 개신교 선교사, 미국 고문단

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서양인들을

평양과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 포로

수용소로 이동시켰습니다. 또한 한

국전쟁 이전부터 체포되었던, 덕원

과 함흥지역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10월부터 북쪽으로 이동시키며 만

포를 거쳐 옥사독 수용소에 억류시

켰습니다. 이고난스러운이동과정을 ‘죽음의행진’이라부

릅니다. 죽음의행진과혹독한수용소생활중많은이들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상당수가 고령이라 몸을 제대로 가누

기도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도

잘 주지 않은 채 영하 40도의 엄동설한에 ‘죽음의 행진’을

강행시켜상당수의포로들이동사혹은아사하거나인민군

들에게살해되었습니다.

가르멜 외국인 수녀님도 죽음의 행진에서 두 분은 돌아

가시고 세분은 3년의 포로생활 후 본국인 프랑스로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송환된 지 6개월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

아온두수녀님중마리마들렌수녀님께서북한포로생활

을 생생한 증언으로 남기신 책이 『귀양의 애가』입니다. 포

로가 되어 북한군에게 죽은 국내외 가톨릭 사제, 수사, 수

녀, 신학생들의 숫자가 150명을 넘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는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

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시복시성을 진행하

고있습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

서울대교구홍보위원회부위원장

‘죽음의 행진’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