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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선조

숨결

을 따라

성지순례길-수도권지역

따가운여름햇살이쏟아져내립니다. 오랜가뭄으로고즈

넉한 전원 풍경이 곱지만은 않네요. 바싹 메마른 땅에 성지

를 알리는 우람한 바위가 서 있군요. 천 년이 가도 변치 않을

바위에서 순교

자들의 항구한

마음을 엿봅니

다. 낮은 돌담

으로 둘러싸인

성지의 검고 큰

솟을대문이 인상적이네요. 안으로 들어서자 넓게 펼쳐진 마

당과 오른편의 대성전, 그리고 양쪽으로 높이 선 두 개의 순

교자 현양 탑과 정면의 십자가 밑으로 나란히 자리한 순교자

봉분들이고즈넉하군요.

2014년에 시복된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복자 오 마르

가리타 부부, 어린 자식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 막

고 끌려간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 귀머거리였

던 남편과 수화로써 치명을 약속한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보

로시나 부부, 삼대 가족 넷이 함께 순교한 여기중과 아들 여

정문과 며느리와 손자, 부자가 나란히 교수형 당한 최성첨과

아들, 한 날 처형된 이웃사촌 이희서와 홍천여, 이 년 뒤에

장인의 뒤를 따른 이희서의 사위 이진오, 일 년 전에 공주 감

영에서 치명한 남편 고요셉의 뒤를 따라 자식을 떼어놓고 순

교한 문 막달레나, 아홉 식구와 함께 체포되어 홀로 목숨 바

친 한치수 프란치스코, 관아에서 조만과와 교리문답을 암송

하며 신앙을 고백한 유 베드로, 옹기를 구우며 교우촌 공동

체를 이룬 정덕구 야고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열일곱 살

난 딸을 치한들에게 내어준 김 도미니코와 김인원, 치명 기

록만 남은 홍치수와 정 토마스와 금 데레사 등 24위 순교자

들의삶이기구하기그지없네요.

죽산은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갈라지는길목이어서도

성을 수호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1595년에 도호부가 되었으며, 1635년에는 여주에 있던 진

영이 옮겨와 죽산도호부사는 수어후영장과 토포사를 겸하게

되었지요. 그에따라죽산도호부사는 1866년병인박해때막

강한 힘을 가지고 천주교인들을 체포하고 처형하였던 겁니

다. 봉분이 마련된 24위 외에도 백여 명에 달하는 교우들이

단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고문받다 처형

당하였던것이

지요. 좌우로

12기씩 놓인

봉분 한 가운

데 자리한 무

명 순교자 묘

가가장큰까닭을알만하군요.

이곳은 고려 때 송문주 장군이 지키던 죽주산성을 공략

하기 위하여 몽고군이 진을 쳤던 자리라 이진

(夷陳)

터라 불렸

습니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곳으로 끌려가면 죽

은 사람이니 잊으라는 뜻으로 ‘잊은 터’라 불리기도 하였답니

다. 이곳의 비참한 역사가 잘 드러나고 있네요. 지명 유래를

알고 나니 가슴이 더 먹먹해집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잊은 터’에 끌려가 견결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다 치명

한 신앙 선조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척박한

땅에 ‘눈물로씨뿌리던’

(시편 126,5)

분들을말입니다.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교수

순교자묘

염화강

죽산 순교성지

(경기도안성시일죽면종배길 115)

죽산순교성지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