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ous Page  3 / 4 Next Page
Information
Show Menu
Previous Page 3 / 4 Next Page
Page Background

֕ ਔ ੈ

말씀

이삭

침묵속에만나는하느님

초등학교 때 ‘우리 집 가훈 알아 오기’ 숙제가 있었습니

다. 한 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매번 같은 문장을 적어 주셨습니다. “침묵은 금이다.” 아버

지 특유의 굵은 베이스톤 목소리로 짧은 설명도 곁들여 주

셨지만, 어릴 때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침

묵이 진짜로 금이라는 게 아니라, 황금처럼 좋은 것이라는

것까지만 알아 두었죠. 그런데 애써 기억하거나 실천하려

한것도아닌데, 이게자라면서은근히생각이많이났습니

다. 이세상의여러멋진격언들을접할수록, 왜하필그한

문장이아버지의선택을받았을까궁금했던것같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그 말의 의미가 점차 이해되기 시

작했습니다. 물론 저는 직업상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

을하고있습니다. 특히, 대중을상대로말하는경우가대부

분이죠. 하지만, 제가 방송국 기자였을 때도, 기자의 본질

은취재, 질문을던지는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관찰과청

취가 우선이었습니다. 통역사로서도 마찬가집니다. 전달하

려는 원문을 머릿속에 똑바로 입력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

러니 어찌 보면 저의 직업은 ‘듣기’가 중요한 셈입니다. 문

제는, 잘 들으려면 말을 멈춰야 한다는 점이죠. 즉,

(‘동시’통

역의 애로사항이기도 합니다만)

입을 닫아야 귀가 열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다른 수많은 미덕을 놔두고 ‘침묵’

이란 두 글자를 강조하신 이유를 이제야 조금씩 헤아릴 수

있게 된 건, 직업적인 특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입을 다물

수록, 제 몸 겉에 달린 귀만 열리는 게 아니라, 제 몸 안에

있는 마음의 귀도 열린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아무소리도내지않고침묵속에침잠할때비로소영성의

귀가 깨어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귀가 아무리 다양

한 소리와 정보를 매일 흡수한다 해도, 이 보이지 않는 내

면의 귀는 바깥귀가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들을 수 있습니

다. 나의 깊은 자아가 속삭이는 말도 들을 수 있고, 더 자

세히귀를기울이면, 하느님의음성도들을수있다고저는

믿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께서는, 딸이 인생을 살면서 어려

움을 마주할 때마다, 침묵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길 바라

셨던겁니다.

요즘 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묵’의 가치가 소중하

게 다가옵니다. 불필요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

을보면서. 잘못된말이사회를혼란에빠뜨리는것을보면

서. 그리고무엇보다도내가감히말로써어찌손쓸방법이

없는전세계적위기가진행되는것을지켜보면서, 그저말

없이기도라는침묵에몸을담그고하느님을찾게됩니다.

여러분도 요즘처럼 외출이 자제되고 사람과의 모임이

줄어든 시기일수록, 침묵 속 하느님과의 대화 시간을 늘려

보시면 어떨까요. 평상시 피로감으로 다가왔던 일상도, 미

움으로 받아들였던 한마디도, 기도가 주는 금빛 온기 속에

서 따뜻한 그리움으로 데워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머지않

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거리낌 없이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우리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도 그 온기

가남아있겠죠.

안현모

리디아

|

방송인

김수영

이레네

송파동성당

나를이끄는

성경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