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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의
이삭
침묵속에만나는하느님
초등학교 때 ‘우리 집 가훈 알아 오기’ 숙제가 있었습니
다. 한 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매번 같은 문장을 적어 주셨습니다. “침묵은 금이다.” 아버
지 특유의 굵은 베이스톤 목소리로 짧은 설명도 곁들여 주
셨지만, 어릴 때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침
묵이 진짜로 금이라는 게 아니라, 황금처럼 좋은 것이라는
것까지만 알아 두었죠. 그런데 애써 기억하거나 실천하려
한것도아닌데, 이게자라면서은근히생각이많이났습니
다. 이세상의여러멋진격언들을접할수록, 왜하필그한
문장이아버지의선택을받았을까궁금했던것같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그 말의 의미가 점차 이해되기 시
작했습니다. 물론 저는 직업상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
을하고있습니다. 특히, 대중을상대로말하는경우가대부
분이죠. 하지만, 제가 방송국 기자였을 때도, 기자의 본질
은취재, 질문을던지는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관찰과청
취가 우선이었습니다. 통역사로서도 마찬가집니다. 전달하
려는 원문을 머릿속에 똑바로 입력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
러니 어찌 보면 저의 직업은 ‘듣기’가 중요한 셈입니다. 문
제는, 잘 들으려면 말을 멈춰야 한다는 점이죠. 즉,
(‘동시’통
역의 애로사항이기도 합니다만)
입을 닫아야 귀가 열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다른 수많은 미덕을 놔두고 ‘침묵’
이란 두 글자를 강조하신 이유를 이제야 조금씩 헤아릴 수
있게 된 건, 직업적인 특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입을 다물
수록, 제 몸 겉에 달린 귀만 열리는 게 아니라, 제 몸 안에
있는 마음의 귀도 열린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아무소리도내지않고침묵속에침잠할때비로소영성의
귀가 깨어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귀가 아무리 다양
한 소리와 정보를 매일 흡수한다 해도, 이 보이지 않는 내
면의 귀는 바깥귀가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들을 수 있습니
다. 나의 깊은 자아가 속삭이는 말도 들을 수 있고, 더 자
세히귀를기울이면, 하느님의음성도들을수있다고저는
믿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께서는, 딸이 인생을 살면서 어려
움을 마주할 때마다, 침묵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길 바라
셨던겁니다.
요즘 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묵’의 가치가 소중하
게 다가옵니다. 불필요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
을보면서. 잘못된말이사회를혼란에빠뜨리는것을보면
서. 그리고무엇보다도내가감히말로써어찌손쓸방법이
없는전세계적위기가진행되는것을지켜보면서, 그저말
없이기도라는침묵에몸을담그고하느님을찾게됩니다.
여러분도 요즘처럼 외출이 자제되고 사람과의 모임이
줄어든 시기일수록, 침묵 속 하느님과의 대화 시간을 늘려
보시면 어떨까요. 평상시 피로감으로 다가왔던 일상도, 미
움으로 받아들였던 한마디도, 기도가 주는 금빛 온기 속에
서 따뜻한 그리움으로 데워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머지않
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거리낌 없이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우리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도 그 온기
가남아있겠죠.
안현모
리디아
|
방송인
김수영
이레네
송파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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