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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ਔ ੈ

가톨릭

성인의

글_

서희정

마리아

|

그림_

홍미현

세레나

성체안에계시는

성제라르도마젤라

(축일: 10월16일)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한 이곳은 ‘지

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수도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볼

까요? 사락사락 비질 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오늘도 제라

르도 마젤라 수사가 성전 청소를 시작했나 봅니다. 지금

은 성전 청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처음엔 이탈리아

작은 마을 ‘무로’에서 양복점을 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재

봉 수사로 지냈습니다. 이후 수도원 문지기, 성당 지기,

제의방 지기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왔죠. ‘궂은일’이라

표현했지만, 제라르도 수사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의문

입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내내 늘 웃는 얼굴인 데다 평온

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특히 성전 청소를 맡은 이후에는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니

라 꽃가루를 흩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니까요. 제라

르도 수사가 이리도 행복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

다. 성전 청소를 하는 동안에는 성체와 더욱 가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비질하다가도, 걸레질하다가도, 성체

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그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눈을 마주치듯 말이죠. 그런데 요즘, 제라르도 수사의 얼

굴은 어둠 그 자체입니다. 어떤 여인과 불미스러운 관계

에 있다고 고발당했기 때문이죠. 정말이냐고요? 그럴 리

가요. 아니 뗀 연기에 불이 나는 법도 있나 봅니다. ‘말

(言)

이라는 건 참 무섭습니다. 그 무엇보다 예리한 칼날이 되

어 ‘소문’이라는 덫을 만들고 한 사람을 점점 조여 가거든

요. 형태도 없는 그것의 끔찍함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알 겁

니다. 그 시간이 오래되면 안에서부터 자란 억울함이 명

치를 눌러 숨을 쉴 수 없게 되죠. 그러니 어떤 변명이라도

하거나 소문을 낸 이를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만

도 하건만 제라르도 수사는 침묵을 택했습니다. 그저 묵

묵히 진실이 밝혀지기만을 기도하며 기다리기로 말이죠.

침묵은 제라르도 수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비질을 멈추고 성호를 긋는 걸 보니 청소가

끝난 모양입니다.

성체 앞에 엎드리네요.

어깨가 들썩이고 등이 점점 말려갑니다.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고통이 동반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지금 제라르도 수사를 보면 알

것도 같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말, 자신을 향한 시선, 혼자

라는 외로움,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 그 모든 것은 견뎌

낼 수 있지만,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성체를 모실 수 없

다는 것! 그것은 제라르도 수사에게 이토록 견디기 힘든

지옥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다른 수사가 영하는 성체

를 강제로 뺏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까지 했죠. 이 고

통을 견디는 방법이 달리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도 제라

르도수사는성체앞에서밤을새울것같습니다.

* 덧: 성 제라르도 마젤라를 모함한 이는 훗날 모든 것

이 거짓이었다고 고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