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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가정은 참으로 ‘생명의 성역’입니다”

가정은탄생에서죽음에이르는가족구성원들의전생애를통해특별한역할을수행합니다.가정은참으로‘생명의성역’입니다.그곳에서하

느님의선물인생명은환영을받고생명에가해지는많은공격에서보호를받습니다.그리고참된인간의성장을구성하는요소에따라서발

전할수있습니다.따라서생명의문화를건설하는가정의역할은결정적이고대체할수없는것입니다.

(생명의복음92항참조)

글_

생명위원회

생명운동

노기남 주교님에 대해 정리되어 있는 글을 찾다 보면 굿

뉴스 안에서 「경향잡지, 2017년 8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

로의 1942년 한국인 주교의 탄생」이란 글에 정리된 표현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1845년에서부터 97년이

지난 1942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했다. 주인공

은명동본당의노기남보좌신부였다.”

여기에 약간의 사실을 추가하면, 우리나라의 최초의 신

부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그 뒤로 97년이 지난 1942년

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주교님이 탄생하고, 그

뒤로 27년이 지난 1969년에는 한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

환 추기경께서 탄생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최초의’라는단어를여러번사용하였습니다. 어

쩌면이순간들은이미파리외방선교회가서울대목구를담

당하였던그순간에이미예견되었던것은아닐까요?

노기남 주교님이 교구장으로 계실 때에 우리나라는 정

말 큰일을 많이 겪어냈습니다. 일제 말기와 광복, 6.25 전

쟁, 휴전협정까지 1942년~1953년 근 10여 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간절했던가를 생각하게 하고,

동시에 교회는 그 힘든 상황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고민하였을까요?

한국교회 초기에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것에서 시작해

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학을 보내고 한국 교회의 장래

를 걱정하신 노기남 주교님이 안계셨다면 2018년 한국교

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렇게 힘든 시기에 오히려 미

래를내다보고사람에투자한분이계셨기에서울대교구는

지금 신부님 900명으로, 큰 교구가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전쟁통에 나라가 둘로 나뉘고 복구에 엄청난 도움을 필요

로 할 때 외국에 직접 나가서 발로 뛰셨던 주교님이 안 계

셨다면 그 적극적인 원조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

느 신자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때는 한국이란 나

라가어디에있는지도몰랐을때라고….’

‘1962년 3월 한국교회 교계제도를 설정하고 서울, 대구,

광주 관구가 설립되고 동시에 노주교님은 서울대교구장으

로임명됨과동시에대주교로승품

(昇品)

되었다.’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님을 기억합니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님으로서 주교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일들을

해주시고서울대교구를지켜주셨음을기억합니다. 고맙습

니다우리주교님.

역대

교구장

올한해동안서울대교구역대교구장에대해아주작은퍼즐이라도함께찾아보고, 그분들의마음을공감하는시간을가졌으면좋

겠습니다. 아무리좋은것이라도직접찾아보고, 생각하고, 공감하지않으면나와상관없기때문입니다. 오늘의서울대교구가있기까

지헌신하신교구장들의삶이주는울림을전합니다.

우리가찾은서울대교구열번째교구장님은노기남대주교입니다.

10

10대교구장

1942년~1967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이도행

토마스신부 | 홍보위원회사무부국장

· 1930년10월26일서품.

· 1942년12월20일명동대성당에서주교성성식.

· 한국인최초의주교이자교구장.

· 광복전후의격동기에슬기롭게교회를이끌었으

며, 노력을 더하여 1962년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

제도가설정되도록함.

· 1984년6월25일에선종하여용인천주교묘지에

안장됨

사진한국교회사연구소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