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ous Page  4 / 12 Next Page
Information
Show Menu
Previous Page 4 / 12 Next Page
Page Background

ࢮਊભ߽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환대와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각자는잉태된첫순간부터부모님과사회로부터고귀한존재로서환대와보호와사랑에찬양육을받아지금까지살아올수있었

습니다.이러한환대와보호는사랑의관계안에서이루어지며이사랑은사람이죽기를바라지않고살아서잘있기를바라는사랑입니

다.그러므로태어나는모든사람은이러한환대와보호를필요로합니다.

(2018생명대행진염수정추기경님메시지중에서)

글_

생명위원회

생명운동

‘더욱 전교에 힘써 1887년 말에는 14명의 성직자, 14명의

신학생과신자수1만5,000명을헤아릴수있게되어, 박해로

거의다쓰러져가던조선교회를재건하는데성공하였다.’

우여곡절이많고힘들었던리델주교님을도와서조선교구

를다시재건하고, 하나하나다시기틀을만드셨던블랑주교

님은동료신부님들을챙기고, 그와중에도전교활동에집중

한다는것이얼마나힘드셨을까생각합니다.큰박해가이어지

면서신자들은더깊이숨어들어가고서로를믿지못하는상

황임을생각하면이런성과는보기보다열배에가까운노력이

녹아들어있다고봐야겠지요.그중에기쁜소식도있었지요.

‘1888년6월8일에조선교구를예수성심께봉헌하는장엄한

미사를올려신교의자유를얻게된최후의승리를감사드렸다.’

선임교구장님이그토록하고싶으셨던일을잊지않고하

느님께 봉헌하셨던 게지요. 게다가 방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용산신학교를세우시고, 서울에고아원과양로원을세움으로

써교회가앞으로조선교구를위해먼저무엇을해야할지가

야할바를보여주셨던것을기억합니다.

블랑 주교님 같은 경우는 이제까지 1~6대 교구장님과는

상당히 다른 상황으로 보입니다. 6대 교구장님까지는 심한

박해의 상황에서 전교 자체가 힘들었던 시기이고, 계속적으

로 죽음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이었지만, 7대 교구장님 때는

전교의 자유가 생기고 교회가 안정적으로 근거지가 되는 종

현성당

(명동성당)

까지 세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

쩌면 이제까지 그렇게 하느님께 기도했던 것들이 하나둘 눈

앞에 실현되고, 이제는 다른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그것들

을해나가기위해고민하셨던시기로보입니다. 그때세우시

기 위해 자리를 잡으시고 고민하셨던 종현성당과 약현성당

이 오늘날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지 생각하면, 그때

그고민들이헛되지않았음을깨닫게됩니다. 굿뉴스에서 ‘한

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이라는 글에서는, 그간 방인

성직자양성의열매가어떻게되었는지찾아볼수있습니다.

‘블랑주교는국내의신학교도다시설립하였다. 그리고이곳

에서교육받은강도영마르코, 정규하아우구스티노, 강성삼

라우렌시오가1896년4월26일에약현성당에서사제품을받

았다. 세명의신부는김대건신부이후 50년만에탄생한한

국인사제였다.’ 공동체를다시세우고성당을만들고성직자

를 양성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셨을 주교님을 기억합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할 때 꼭 주교님의 모범을 기억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우리주교님.

역대

교구장

올한해동안서울대교구역대교구장에대해아주작은퍼즐이라도함께찾아보고, 그분들의마음을공감하는시간을가졌으면좋

겠습니다. 아무리좋은것이라도직접찾아보고, 생각하고, 공감하지않으면나와상관없기때문입니다. 오늘의서울대교구가있기까

지헌신하신교구장들의삶이주는울림을전합니다.우리가찾은서울대교구일곱번째교구장님은블랑주교입니다.

이도행

토마스신부

· 1866년12월22일서품.

· 1876년 5월 8일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82년에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883년 7월

8일주교로성성되었고, 이듬해 6월 20일교구장

을승계함.

·박해이후의 교회재건에 노력하였으며, 명동대성

당을건립하던중1890년2월21일선종.

사진한국교회사연구소제공

07

7대교구장

(프랑스) 1884년~1890년

블랑

(Blanc,백규삼)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