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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께서는우리를어머니의태중에서지어내셨으며,우리가아직형체도없을때에도우리를사랑하셨습니다.우리는엄청난기쁨에

겨워외칩니다.“제가오묘하게지어졌으니당신을찬송하나이다.”

(시편139)

우리도매일의기도속에서,생명을주신우리아버지하느님

을찬미하고찬양해야합니다.생명을경축하는것은곧생명을주시는하느님을찬미하는것입니다.

(생명의복음84항)

글_

생명위원회

생명운동

리델주교님의약력을보다보면, 1866년이상당히중요

한 해였던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해 병인박해가 일어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들과수많은신자가순교하였지요. 보통학교에서역사를

배우다보면병인박해와함께병인양요가더큰일로알려져

있습니다. 강화도에프랑스군함이쳐들어온사건이라고생

각하고 있을 텐데, 가톨릭 굿뉴스 안에서 진무영 순교성지

(인천광역시강화군강화읍북문길 41)

에관련된글을보면리델주교

님에관해간략하면서도정확하게정리되어있습니다.

“그때리델신부는조선신자 10명과함께배를타고중국

으로 탈출하였습니다. 훗날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이 된 그

는 조선에 남아있는 페롱 신부와 칼레 신부를 구출하는 한

편,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구해줄 것을 자국에 요청하였던

겁니다. 이에프랑스극동함대사령관인로즈가강화도에상

륙하여고려궁지에있는외규장각의서적과은괴등을약탈

한 병인양요가 터졌지요.”

(2017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일 서울주보 5

면 참고)

아마도 이 일 때문에 그리고 그 후에 상황들 때문에,

11년이나 조선에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는 걸 알았을 때 어

떤 느낌이었을까요? 중간에 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음에

도 8년이나 자신의 사목지에 들어오지 못하고 고민하셨을

시간들이많으셨겠지요. 10년이나목자없는선교지로남아

간절히 신부님들을 기다리는 조선에, 그 누구 한 명이라도

다시들어가활동할수있도록방법을찾고그것을하나하나

조심스럽게실행에옮기는주교님의마음을헤아려봅니다.

자신도 힘들게 입국하였음에도 얼마 못 가서 발각이 되고

옥에갇혔다가, 만주로추방당하고결국에는병환으로고국으

로돌아가 54세로선종하신것을자료를찾으면서알게되었

을 때 얼마나 몸과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한불자전과 교리문답 책을 완성해서 출판하였다는

것은여러가지를느끼게합니다.조선에몇명남지않던신부

님이한명도없게되었을때도, 옥에갇히고추방당하여아무

것도못할정도로절망적인순간에도굴하지않고조선교회을

위해 꼭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절박한

순간에하느님의도우심을빌며잠시조선을떠나야했던주교

님의마음을기억합니다.남아있는하느님의백성을위해방법

을 찾고,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셨던 주교님의 선택과 하느님

의도우심으로,조선에다시선교사신부님들이들어오게되었

음을기억합니다.덕분에우리교구는이렇게멋지고행복하게

성장하였습니다.고맙습니다.우리주교님.

역대

교구장

올한해동안서울대교구역대교구장에대해아주작은퍼즐이라도함께찾아보고, 그분들의마음을공감하는시간을가졌으면좋

겠습니다. 아무리좋은것이라도직접찾아보고, 생각하고, 공감하지않으면나와상관없기때문입니다. 오늘의서울대교구가있기까

지헌신하신교구장들의삶이주는울림을전합니다.우리가찾은서울대교구여섯번째교구장님은리델주교입니다.

이도행

토마스신부

· 1857년12월19일서품.

· 1861년조선에입국하여활동하다가,

· 1866년중국으로탈출.

· 1869년 4월 27일교구장으로임명되었으며, 이듬

해주교로성성.

· 1877년다시조선에입국한뒤체포되어,이듬해6월중국으

로추방되었다가프랑스로귀국하여1884년6월20일선종.

사진한국교회사연구소제공

06

6대교구장

(프랑스) 1869년~1884년

리델

(Ridel,이복명)

주교